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남

독립기념관

노촌魯村 2012. 9. 6. 23:09

아래 모든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겨레의 탑

민족의 비상을 표현하고 있는 겨레의 탑은 막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새의 날개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양손과 같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영원 불멸의 민족기상을 표상하고 민족의 자주 · 자립을 향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전 · 후면에 무궁화와 태극의 약동하는 부조가 있고, 탑 내부에는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의 4신도를 상징화한 모자이크 조각이 4면을 장식하고 있다. 바닥에는 화강석으로 국토가 그려져 있고, 황동주물관 24괘로 방향을 표시하였다. 높이가 51m인 대형 조형물이다.

 

 

 

 

 

 

 

 

 

 

 

 

겨레의 큰 마당

겨레의 집 앞 광장으로 폭 222m, 길이 258m, 면적은 약 38,535㎡이다. 기념행사나 열린 음악회같이 수만 명이 모이는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다. 중앙부는 화강석 포장으로 되어 있고, 외부는 온양판석과 잔디마감으로 되어 있다.

 

겨레의 집

독립기념관의 상징이자 중심 기념 홀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길이 126m, 폭 68m로써 축구장만한 크기로 높이는 15층 높이(45m)에 이르는 동양최대의 기와집이다. 고려시대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한식 맞배지붕 건물이며, 북경의 천안문보다 더 크다.

 

 

 

 

 

 

 

 

 

 

불굴의 한국인 상

겨레의 집 내부 대형홀 중앙에 위치하며 애국애족의 정이 솟아오르게 하는 기념관 상징 조형물로서 불굴의 독립정신과 강인한 한국인 상을 상징한다. 1개당 무게가 3∼4톤 나가는 화강암 274개를 적석하여 하나의 군상을 이루는 환조이다. 뒷면에는 백두산 천지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조각상이 연결되어 용솟음치듯 창공을 향해 전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백두산 정기를 받은 우리 민족의 자주와 독립, 인류평화와 번영을 향해 쉼없이 표출되었던 불굴의 기상을 표상한 것이다. 뒷면 양쪽에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아가는 독립투쟁의 용사 상이 부조되어 있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북관대첩비는 1708년 함경도 북평사이던 최창대(崔昌大·1669~1720)가 함경도 길주군에 건립했다.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 장군이 이끈 의병들이 왜병을 무찌르고, 함경도로 피란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반란군을 붙잡아 처형한 공적을 두루 기렸다. 그러나 북관대첩비는 원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일전쟁(1904 ~1905) 당시 길주에 주둔한 일본군들은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1978년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가 환수 운동에 나섰고, 마침내 일본 반출 100년 만인 2005년 10월 돌려받았다. 북관대첩비는 이듬해 3·1절 북한에 인도돼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제 자리에 세워졌다. 남한에는 2006년에 경복궁과 독립기념관에도 복제비가 건립됐다.

정문부(鄭文孚.1565(명종 20)~ 1624(인조 2).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해주(海州).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 한성부참군·사헌부지평·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황정욱 등을 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고 투항하자 의병을 조직, 국경인·국세필을 참수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어 쌍포·백탑교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관북지방을 수복하였다. 이후 영흥부사·공주목사·호조참의 등을 거쳐 용양위부호군·안주목사·남원부사 등을 지냈다.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외직을 청하였다. 24년(인조 2) 초회왕에 대하여 읊은 시로 인해,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받던 중 죽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경성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농포집》이 있습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광개토대왕릉비

민족사의 계통을 명백히 정립하고, 고구려인의 기상을 보여주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 재현하였다. 6.4m의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는 4면에 새겨진 1,800여자의 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삼학사 비

호국충절의 상징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1636년) 침략국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실 것을 요구하는 화의를 반대하다 청나라(지금의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 순국한 홍익한 · 윤집 · 오달제 선생을 말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운 삼학사 분들이 지니신 얼을 기리고 본받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자 삼학사비를 세웠다. 이 비는 원래 순국한 삼학사에 대하여 청태종이 비록 적국의 신하지만 삼학사의 충절에 감복하여 삼한산두(三韓山斗 : 태산처럼 높고 북두칠성처럼 빛남)라는 휘호를 내리고 충절을 기리는 비와 재단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35년 만주 지역의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비를 재건립 하였지만 문화혁명 시기에 다시 파손되었다.

 

 

    

     

위의 모든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독립기념관

위대한 유산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