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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은해사대웅전(銀海寺大雄殿)

노촌魯村 2013. 4. 14. 09:18

 

 

 

 

 은해사 대웅전(銀海寺大雄殿.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7호.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신라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원래의 이름은 해안사(海眼寺)였다. 그후 고려 원종(元宗) 5년(1264년)에 중수(重修)하였으나 인종 1년(1545년)에 실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인 명종 1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대사(天敎大師)가 지금의 자리에 옮겨짓고 이는 나라의 은혜라는 뜻에서 은혜의 음(音)을 따서 은해사로 고쳤다. 그러나 이 절 역시 18년만에 불타 버리고 다음해에 다시 묘진대사(妙眞大師)가 중건(重建)하였으나, 1847년 또다시 불타 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1906년 당시의 김기철(金箕哲) 군수가 기금을 모으고 석담(石潭) 스님과 대중(大衆) 스님이 시주를 모아 부속건물을 많이 넣고 대중수(大重修)한 것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현판은 단아하고 웅장한 필치의 추사의 친필이다.
건물의 창호는 어칸의 출입문만 꽃창살이고 다른 문은 빗살창 문살을 하고 있다. 또한 전각 앞에는 괘불석주 두 쌍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은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큰 힘이 있어 마군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은해사 자료)

 * 은해사 대웅전은 현재 극락보전 현판이 걸려있음

 

 

 

 

아미타삼존불

대웅전(현재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목불로서 밋밋한 느낌이 듭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고 그 수인(手印)으로 보아 아미타 불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미년 대화재 당시 당우가 소실되었는데, 이때 극락전에 있던 이 아미타불좌상을 이후에 대웅전을 지은 다음 본존으로 모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 불상은 측면 처리가 얇은 것이 흠인데 이는 큰 통나무 하나를 파서 만들었기 때문에 재료의 한계성에 기인한 듯합니다. 아마도 이 불상의 제작 시기는 선조(1568~1608) 연간 중창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은해사 자료)

 

 

 

대웅전 현판

1862년 혼허 지조(混虛 智照)스님이 지은「은해사중건기」를 보면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秋史 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했으며, 그 뒤 1879년 당시 영천군수이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의 편액인 '銀海寺', 불당의 '大雄殿', 종각의 '寶華樓'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의 '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이다"라고 했다. 이들이 말한 추사의 글씨를 은해사는 지금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의 그 가운데 하나인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이 글씨 들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온갖 신산을 격으며 한결 무르익고 원만해진 추사의 솜씨와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 차츰 노성함을 뛰어 넘어 무심함의 경지로 다가가는 그런 글씨들인 것이다.(은해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