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락정 (枕洛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9-1)
영남의병대장이던 김해의 아들 김광계(1580∼1646)가 조선 현종 13년(1672)에 세운 누정으로, 일명 운암정사라고도 한다.
집 이름은 ‘정(亭)’이지만 일종의 강당 건물로, 학문을 강론하고 시(詩)를 짓기 위한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원래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있는 자리로 옮겼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인데 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정자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간소한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의병대장 근시재(近始齋)선생 순국기념비
김해(金垓) : 이조 선조때 의병대장인 공의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이오 본관은 광산이다. 읍청정 부의의 아들로 1555년(명종 10)에 와룡면 오천동서 태어났다. 천거로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지내고 검열로 있을때 사국에서 사초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공은 소시부터 성현의 가르침에 뜻을 두어 퇴도선생에게 직접 교훈을 받지 않았으나 그 유훈을 절선하였다. 또 서재에 고요히 앉아 깊이 생각하여 얻은 바가 있으면 기록하여 두고 의심하는 구절에는 월천, 학봉, 서애선생에게 질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이 전리에서 눈물을 머금고 죽음을 맹세하고 의병을 참가하니 영남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좌우부장에 이정백, 배용길을 삼고 안동.의성.군위 등지에서 분전했다. 훌륭한 의병대장을 모시니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떨쳤고 글을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내니 그 글뜻이 비장강개 하였다. 이듬해 평양 탈환전에서 수십명의 적을 살해하고 계속 추격 남하하여 밀양에서 군사를 정비하여 경주로 이동한 후 진중에서 전사하니 수가 38세였다. 선조는 그 충성을 포장하여 수찬을 증직하였다.(출처 : 안동시청)
탁청정 (濯淸亭.중요민속문화재 제226호.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8-1)
조선 중종 36년(1514)에 김수가 지은 광산 김씨 종택에 딸린 정자이다. 원래는 낙동강에서 가까운 오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4년 지금 위치로 옮겨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인데, 앞면보다 옆면의 칸 사이를 넓게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지붕의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마루에는 난간을 돌렸다. ‘탁청정’이라는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며, 마루에는
퇴계 이황 등 당시 유명한 학자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영남지방에 있는 개인 정자로는 가장 웅장하고 우아한 건물이다.(출처: 문화재청)
탁청정종가(濯淸亭宗家.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호.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8-1)
조선 중종 36년(1541) 탁청정 김수(金綏)가 지어 살던 집으로, 몸채와 탁청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예안면 오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4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몸채는 총 22칸 규모이며 ㅁ자형으로 되어있다.
탁청정은 몸채에
딸린 정자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1991년 중요민속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설월당
후조당 (後彫堂.중요민속문화재 제227호.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8-1)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이 지었다고 전하는 별당건물이다. 원래는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4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종택은 별당·정침·사당·재사·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정침에 부속된 건물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一'자형에 오른쪽으로
2칸 마루와 방을 달아 'ㄱ'자형을 이룬 큰 규모의 별당이다. 정침 왼쪽 담장 안에 있으며, 정침으로 통하는 협문과 정문을 갖추었고 왼쪽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신문(神門)이 있다. ‘후조당’이라는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대청의 천장에서 고서 및 문집류, 고려
말기의 호적, 조선시대의 호적·교지·토지문서·노비문서·각종 서간류 등 희귀한 전적류가 발견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광산김씨재사및사당<재사3동,사당>(光山金氏齋舍및祠堂<齋舍3棟,祠堂>.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8-1)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1445∼1534)와 증손자 김해(1555∼1592)를 모시고 있는 사당과
후조당에 부속된 재사(제사지내는 집)이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5년 오천리 낙동강변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김효로가 죽은 지 2년 뒤인 조선 중종 31년(1536)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김해를 같이 모시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김남수(金南洙) :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심(仲尋), 호는 우전(雨田)·학산(學山)이다. 1899년(고종 36)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서 탁청정(濯淸亭) 종손 김영도(金永燾)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김남수는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세운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와 서울 중동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예안면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가을 류인식의 지도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그의 사회운동은 시작되었다. 안동청년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던 그는 상경하여 동향 출신인 김재봉.권오설·이준태 등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에서 활동하며 서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923년 6월 경성고무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女工) 동맹파업의 전말(顚末)」이란 보도 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하였다가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3년 11월에 그는 안동에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여 안동에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1924년 이후 안동 지방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김남수는 1925년 1월에 청년운동단체들을 지도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고,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주도 인물이 되었다. 그 해 4월에는 화요회가 계획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상남도 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 1925년 10월에는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았다. 1925년 11월에는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 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해 11월에는 기자들의 모임인 안동기우단을, 다음해 12월에는 안동기자단을 결성하였다.
이후 제3차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1928년 9월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폐병에다가 ‘정신이상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어려운 옥살이를 하였다. 또 1939년에는 사문서 위조 행사라는 이름 아래 다시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옥중 투쟁의 여독으로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사망하였다.(출처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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