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전남

구례운조루(求禮雲鳥樓)의 봄(春)

노촌魯村 2014. 4. 23. 22:28

 

 

구례운조루(求禮雲鳥樓.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오미리))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다.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누각아래 기둥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특이하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 (柳爾胄)가 세운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 (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 (歸晩) 이라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 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에서 따온 글 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있다.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金龜沒泥), 금환락지 (金環落地), 오보교취 (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 (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 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의 누 마루는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이 집은 건 평 129평 으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 자형의 사랑채와 ㄷ 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있는 목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조들의 유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출처: 운조루 닷컴)

 

운조루에는 홍살문에 걸린 호랑이뼈(오른쪽은 호랑이뼈?. 왼쪽은 도난 후 말머리뼈로 대신함?) 

운조루 솟을대문의 홍살문에는 원래 호랑이 뼈를 달아 놓았다고 한다. 운조루에서는 호랑이 뼈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이 집을 지은 유의주가 무관으로서 호랑이를 때려 잡은 용맹스러움을 알리기 위함이다. 기록에 의하면 안동 태생인 유이주가 평안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위해 삼수갑산을 넘게 되었는데, 새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유이주는 채찍으로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기가 침범하지 못하게 운조루 대문에 걸어 두었다고한다.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한 운조루는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다는 최고의 명당터로‘하늘에서 금가락지가 떨어진 곳이라는 금환락지의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99칸(현존73칸)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입니다.운조루라는 택호는“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과“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귀입니다.“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에서 첫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온 것입니다.
한편 운조루 창건 과정에서 운조루가 명당의 증거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 만한 돌거북이 출토 되었는데, 이는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안타깝게도 지난 1989년 도난당했습니다. 운조루에는 홍살문에 걸린 호랑이뼈, 66칸의 집, 우마차의 나무바퀴,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사진 자료와 유물, 추사 김정희병풍 등이 있습니다. 운조루가 아직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명당중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것도 있지만 이 저택이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출처:구례군청)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본다.

 

 

 

 

    

 

 

맷돌 양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크게 나누어 중부와 남부 지방의 것으로 구분된다.

중부지방의 맷돌은 암쇠와 수쇠의 크기가 같고, 매함지(굵은 통나무를 둥글고 편평하게 판 것으로 갈아진 곡물가루를 담는 함지)나 매판(매함지가 귀한 곳에서 사용하며 Y자형으로 갈라진 넓고 두툼한 나무에 3개의 발을 달고 맷돌을 올려놓는 판)을 깔고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남부지방의 맷돌은 수쇠가 암쇠보다 넓고 크며 한 옆에 주둥이까지 길게 달려 있어 매함지나 매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며, 균형이 잡히고 섬세하다.(출처:브리태니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