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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김유정문학촌

노촌魯村 2014. 6. 8. 22:08

 

 

김유정문학촌(원도 춘천시 신동면 실레길 25)

1930년대 우리나라 농촌의 실상과 그 삶을 탁월한 언어감각과 투박하면서도 정확한 문장, 그리고 독특한 해학의 능청으로 묘사하고 있는 한국 단편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소 설가 김유정(1908~1937)의 고향인 실레마을에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는 등 마을전체를 ‘김유정문학촌’이라는 문학공간으로 탄생시켰다.

주요시설로는 생가, 외양간, 디딜방앗간, 휴게정, 전시관등이 있으며 김유정소설 속 작품세계를 재현한 프로그램들이 연중 다채롭게 개최되고 있다. 또한 문학촌을 중심으로 김유정 소설 속 실제지명을 순례할 수 있는 문학산책로와 금병산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실레마을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모하기는 했지만 정감있는 전원풍경이 잘 남아 있어 그의 작품속에 나타난 순박한 시골 사람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다.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레) 427번지,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서 부친 김춘식(金春植) 모친 청송(靑松)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출생, 10대조 김육(金堉)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실학(實學)의 선구자였으며, 9대조 김우명(金佑明)은 현종(顯宗)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였고 숙종(肅宗)의 외할아버지였다.

고조부 김기순(金基恂) 때 춘천 실레마을로 이주했다. 증조부 김병선(金秉善)은 실레마을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거유(巨儒)인 김평묵(金平默)을 초빙, 학당(學堂)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케 했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 학풍(學風)을 이어받은 조부 김익찬(金益贊)은 춘천 의병(義兵)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조부때 6천석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도사(都事)벼슬.

김유정이 탄생하는 그해에 춘천의 2차 의병봉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세가 드높았다.

1914년 11월 26일 유정의 조부 도사(都事)벼슬을 했던 김익찬(金益贊)사망.

이때부터 부친 김춘식(金春植)을 참봉으로 호칭. 이해 겨울에 한양(漢陽-지금 서울)의 종로구 운니동(당시 진골)에 대저택을 마련, 가족이사. 춘천에 집을 그냥두고 소작농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

1915년 7세. 3월 18일 어머니 청송 심씨 사망. 춘천에 내려갔던 형 유근(裕近)이 미처 오지 못하자 홀로 상주가 됨.

1917년 9세. 5월 23일 아버지 김춘식 사망. 고아가 됨. 형님과 형수 누님의 사랑을 받음. 운니동(雲泥洞)에서 관철동(貫鐵洞)으로 이사. 1919년 봄까지 3년 동안 한문 공부와 붓글씨를 익힘. 김유정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 고전지식은 이때 익힘.

1920년 12세. 재동공립보통학교(齋洞公立普通學校)에 입학. 재동공립보통학교가 있던 지역은 당시 우리나라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중심지

1921년 13세. 3학년으로 월반

1923년 15세. 재동공립보통학교 4년 (제16회)졸업. 4월 9일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검정(檢定)으로 입학. 숭인동(崇仁洞) 80번지로 이사. 학적부에는 가족 11명, 형제 2명, 재산 5만원 성질을 질박, 키는 5척. 이름을 김나이(金羅伊)로 고쳐 집에서 부름.

소설가가 된 안회남(安懷南)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냄.

1926년 18세. 휘문고보 3학년을 마치고 휴학

1927년 19세. 휘문고보 4학년에 복학

1928년 20세. 형 유근가족 춘천 실레로 이사. 유정은 봉익동 삼촌집에 얹혀 지냄. 인간문화재 박녹주(朴綠珠) 공연을 처음 관람

1929년 21세.휘문고보 5년 졸업(제 21회). 삼촌댁에서 사직동 둘째 누님 유형(裕瀅)집으로 거처를 옮김(누님은 이혼 후 양복공장 근무)

1930년 22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交)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6월 24일 학칙 제 26조에 의거, 제명처분 당함. 유정은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자퇴했다고 함.

박녹주를 짝사랑했으나 끝내 거절당함. 춘천 실레에 내려와 방랑생활. 들병이와 친해짐. 늑막염 재발. 안회남의 권고로 소설을 씀

1931년 23세. 4월 20일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에 다시 입학. 그 후 자퇴함. (퇴학자 명단에만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음). 실레 마을에 야학당(夜學堂)을 열다.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 조직. 농우가(農友歌) 지어 부름

1932년 24세. 야학당을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넓히고 간이학교로 인가받음. 느티나무를 식목함. 6월 15일 처녀작 단편 <심청>을 탈고(4년 뒤인 1936년 중앙지에 발표).

1933년 25세.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서 누님과 함께 기거. 폐결핵 발병진단.

1월 13일 <산골 나그네> 탈고, 안회남의 주선으로 제1선지 3월호에 발표.

8월 6일 <총각과 맹꽁이>를 탈고, 신여성 9월호에 발표.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쳐서 처녀작은 <산골 나그네>가 됨.

사직동 시대 유정은 톨스토이가 되고자 함. 이석훈(李石薰), 채만식(蔡萬植), 박태원(朴泰遠), 이상(李箱) 등을 만남.

1934년 26세. 누님이 사직동 집을 처분. 혜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밥장사.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전전함

8월 16일 <정분> 탈고. 9월 10일 <만무방> 탈고. 12월 10일<애기> 탈고. <노다지><소낙비>를 12월에 탈고. (1933년의 <따라지의 목숨>을 1934년 <흙을 등지고>로 개작, 신문사와 협의 <소낙비>가 됨) 안회남이 대신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부침.

1935년 27세.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소낙비>1등 당선.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노다지>가작 입선. 1월 20일 아서원서 신춘문예현상 1등 당선 축하회. 6월 3일 백합원서 조선문단사가 주최한 문예좌담회에 참석. 김유정은 안회남(安懷南), 김남천(金南天), 이학인(李學仁), 박영호(朴英鎬), 이선희(李善熙), 함대훈(咸大勳), 이헌구(李軒求), 이석훈(李石熏), 김환태(金煥泰), 이무영(李無影), 한인택(韓仁澤), 서항석(徐恒錫), 정지용(鄭芝溶), 김희규(金憘奎), 이하윤(異河潤), 김광섭(金珖燮), 방인근(方仁根), 최정오(崔定吾) 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했다.

단편 <금따는 콩밭>, <개벽> 3월호, <금>발표지 미상, 1월 10일 탈고, <떡>중앙 6월호,<만무방> 조선일보 7월, <산골>조선문단 7월호, <솟>매일신보 9월, <홍길동전> 신아동 10월, <정분>의개고작, <봄·봄>조광 12월호 등을 발표한다. 이 한해에 소설 11편과 수필 <잎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조선 중앙일보 3월 6일,<조선의 집시-들병이 철학>매신일보 10월, <나와 귀뚜라미>조광 11월호 등, 3편을 발표, 6월 3일 <조선문단>이 주최한 문예좌담회에서 이태준(李泰俊)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임.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참여. 이상과 깊은 친분을 가짐. <안해>를 사해공론(四海公論) 12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찬사를 받음

1936년 1월부터 8월까지 9편의 소설과 4편의 수필을 발표.

단편<심청>중앙1월호, <봄과 따라지>신인문학 1월호, <가을>사해공론1월호,<두꺼비>시와소설, <봄밤>여성 4월호, <이런 음악회>중앙 4월호, <동백꽃>조광5월호, <야앵>조광7월호, <옥토끼>여성7월호 가 각각 발표됨. 미완의 장편소설 <생의 반려>는 중앙 8,9월호에 연재됨.

수필<오월의 산골짜기>,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전차가 희극을 낳아>, <길>등을 5월에서 8월 사이에 발표하고 <행복을 등진 정열>은 여성지 10월호에, <밤이 조금만 짤렀드면>은 조광지 11월호에 발표.

단편소설 <정조>는 조광지 10월호에, <슬픈이야기>는 여성지 12월호에 발표, 마지막 여인 박봉자를 짝사랑 하였다.

병이 깊어져 김문집이 병고작가 구조운동을 벌임.

서간문 <문단에 올리는 말씀>을 조선문학 1월호에 게재.

수필 <강원도 여성편>여성 1월호, <병상 영춘기>조선일보 1월 29일∼2월 2일 발표. 2월 조카 진수에 의지하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100번지의 매형 유세준의 집에 옮겨와 요양 치료함.

소설 <따라지>조광 2월호, <땡볕>여성 2월호, <연기>창공 3월호 발표.

서간문<병상의 생각>을 조광지 3월호에 발표하고, 세상뜨기 11일 전인 3월 18일 <필승전>으로 되어 있는 마지막 편지를 안회남에게 보냄.

3월 29일 오전 6시 30분에 30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100번지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함. 서대문 밖(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유해는 한강에 뿌려짐.

이 해의 사후 발표작으로 수필 <네가 봄이런가>여성 4월호, 단편소설 <정분>조광5월호, 번역동화 <귀여운 소녀>매일신보 4월 16일∼21일, 번역 탐정소설 <잃어진 보석>조광 6월∼11월호 발표됨

1938년 단편집 <동백꽃>(三文社) 발간됨

1939년 사후 발표된 소설로 <두포전> 소년1∼5월호, <형>광업조선 11월호, <애기>문장12월호가 있다(출처:김유정문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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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imyoujeo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