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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개태사(開泰寺)

노촌魯村 2015. 3. 4. 22:26

 

논산 대전 간 국도를 따라 연산사거리를 지나 오르막을 꺾어 내리다 오른쪽으로 마치 한옥의 지붕처럼 길게 뻗은 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바로 천호산이다.

이곳 천호산 자락에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었다는 개태사가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절이지만 전성기에는 1천여 명의 승려가 도량하였고, 8만 9암자를 소속시켰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 사찰이다.

현재 진행 중인 개태사지 복원 사업이 완료되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거듭 날 것이다.

병풍처럼 생긴 천호산 아래 하늘의 보호를 받아 자리한 개태사는 연산검문소를 지나 대전 방면으로 1㎞쯤 가다보면 우측에 한눈에 들어오는 절이 보인다. 이곳이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꿈을 이루고 하명으로 지었다는 개태사다.

이러한 연유로 개태사는 고려 “대호국사찰”의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대웅전에는 태조왕건이 후백제를 멸하고 마침내 3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조성했다는 삼존석물이 있다. 이 개태사의 삼존석불은 조선시대 이전의 불상 중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키가 큰 주존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좌협시불, 우협시불이 있다. 중앙의 본전불은 좌우 230㎝, 앞뒤216㎝ 방대형 대좌 위에 입상으로 되어 있다(출처:논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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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오층석탑(開泰寺五層石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396번지)

개태사는 고려 태조 13년(930) 고려 건국을 기념하고자 창건한 사찰로, 이후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훗날 김광영 스님이 새로 건물들을 지어 ‘도광사’라 하였다가 다시 ‘개태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절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탑은 옛 터에 남아 있었는데, 절을 새로 지을 때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옮길 당시 아래 부분이 일부 없어져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즉, 높직한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이 없어진 채, 5층의 탑신(塔身)만이 차례로 쌓여 있다.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에는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나, 조각 기법이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출처:문화재청)

 

 

 

 

 

 

 

개태사철확(開泰寺鐵鑊.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79-5번지)

개태사는 고려 태조인 왕건이 세운 사찰로, 철확은 이곳 주방에서 사용했다고 전하는 철로 만든 대형 솥이다.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직경 289cm, 둘레 910cm, 높이 96㎝, 두께 3cm이다. 조선시대에 절이 없어지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 있던 것을, 가뭄 때 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일제시대 때 서울에서 열린 박람회에 출품된 후 새로 건립한 지금의 개태사에서 보존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고려 태조 왕건 어진전

고려 태조 왕건 어진

 

극락대보전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論山 開泰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보물  제219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천호리))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이다. 이 삼존석불은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이고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출처:문화재청)

 

중앙의 본존불(本尊佛)은 아미타입상으로 오른손을 가슴에 들었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것처럼 만들었다.
높이는 415㎝이며, 별석으로 만들어진 방대형대좌(方臺形臺座)위에 입상으로 서있는데, 발톱까지도 선명하게 새겼으며, 발등위로 두터운 천의자락 끝이 돌대(突帶)처럼 가로로 얹쳐져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얼굴은 둥굴고 평면적이다.
어깨는 좁고 가슴은 평면인데, 목에는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삼도(三道)가 굵게 새겨져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나 제작 시기가 거의 확실하고, 고려의 후삼국통일의 의지가 담겨있으며, 고려 전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수작에 속하여 이불상의 가치는 높게 평가된다.
좌협시보살상은 오랫동안 땅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조각이 덜 마멸되었다.

높이는 약 350㎝이고, 머리는 다소 큰편이고 어깨가 벌어진 상체에 비하여 하반신이 짧은편이고, 양다리를 볼륨있게 조각하였으며, 넓은 띠 모양의 얇은 옷 형태를 표현한 천의가 다리 양옆의 공간을 메우고 있어 전체적으로 어울리는 구성이다.
목의 삼도는 굵게 표현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허리 부분에서 네손가락을 구부린 여원인(與願印)이고, 왼손능 엄지와 중지를 구부린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손목이라든가 구부리고 있는 손의 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손톱이나 손금 등 세부적인 묘사가 되어있는 등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우협시불은 높이가 321㎝고, 머리 형태나 옷의 표현 양식이 좌협시보살상과 매우 흡사하다. 머리에는 둥근 보계가 있고, 이마 위에 늘어진 앞머리는 둥굴둥굴하게 표현되어있다. 얼굴과 몸체 등 전체적인 표현 양식에 있어 좌협시보살상과 차이가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려 주먹쥔 상태에서 집게손가락만?편 시무외인이고, 왼손은 약지와 새끼 손가락만 편 여원인으로, 좌협시보살상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발은 몸에 비해서 매우 크고 두껍게 표현되었다.
양다리를 감고있는 아랫도리의 옷주름은 얕은 음각선이고 그 위에 늘어지고 있는 천의는 낮은 부조로 나타내고 있어서, 군의와 천의가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옷의 부피감이 표현되지 않아 좌협시보살상에서 돋보이던 아름다운 장식적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출처 :논산시청)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복원 전)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복원 전)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좌협시보살.복원 후)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좌협시보살.복원 전)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우협시보살.복원 후)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우협시보살.복원 전)

1946년 3월 창운각을 지어 국조단군(國組檀君)을 봉안 조국의 독립과 남북통일,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있으며, 단군 영정 주위에는 태극기와 천부경, 백두산 사진이 있다. 또한 1950년 초에는 우주당 건물을 지어 관운장을 봉안하였는데 이는 다가올 환난(6.25)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한다.

 

 

 

개태사지(開泰寺址.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29-1번지 3필)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후, 태조 23년(940)에 지은 절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으로,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개태사(현재)와 개태사지 사이의 직선 거리는 약 300m 정도입니다.

개태사지석조(開泰寺址石槽.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지)

개태사의 옛 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도구이다.
사찰 부엌에서 물탱크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개태사의 옛 터인 마을 안길의 땅속에 매몰된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그 크기가 거대한 것으로 알려져 절에서 쓰던 둘레 9.4m의 개태사 철확(철솥)과 함께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또한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 개태사터의 역사를 살피는데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