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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주

영주 부석사 (榮州 浮石寺)

노촌魯村 2014. 11. 4. 08:49

 

   

 

불교사적위치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초기

중국 유학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거대한 사찰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생김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처음 절이 생겨날 당시가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었다.

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중창

의상의 제자인 신림 이후 부석사는 인적 물적 측면에서 차츰 변화했다. 신림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부석사의 화엄종을 크게 중흥시켰다. 또한 규모면에서도 크게 변모하여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하대 이후에 세워진 사찰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국보 제 17호인 석등이 경문왕때(861∼874)에 만들어진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 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고려이후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 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선생의 화엄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고 하였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수계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다른 하나는 달이다"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종 7년(1041)에 부석사에 들어가 화엄종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 부석사에서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부석사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건립 연대는 명문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적 이듬해인 고려 문종 8년 (1054)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의 부석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다. 기타 고려 때 많은 부석사의 건물들이 중창되거나 창건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성종 24년(1493)에 조사당에 단청을 하였다.

명종 10년(1555)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 6년(1593)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선조 9년(1596)부터 11년까지 석린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영조 22년 (1746)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근대이후

일제시대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기와를 갈았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승당 등을 신축하였다(출처:부석사 자료에서)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榮州 浮石寺 幢竿支柱.보물  제255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17 부석사)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문화재청)

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전부이며, 전부가 하나이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하는 석축

부석사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북지리))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탑을 옮길 때 세워 놓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다.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크기만 약간 다를 뿐 형식은 같아서, 모두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들려 가벼움을 실었다. 꼭대기에는 후에 보충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비록 지붕돌 밑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었으나 전체적으로 당당한 기품을 잃지않은 모습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출처:문화재청)

안양루

이승만 대통령 글씨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국보  제17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출처:문화재청)

석등 앞의 배례석

안양루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榮州 浮石寺 無量壽殿.국보  제18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무량수전 현판(고려 공민왕의 글씨)

무량수전 공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무량수전 처마 곡선

무량수전 연등천장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출처:문화재청)

부석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

귀족 가문으로 호화롭게 성장한 의상조사는 승려로 입문하여 입산수도를 했다. 그 후 서기 650년, 홀로 당나라 양주에 갔을 때 병을 얻어 양주성 수위장인 유지인의 집에서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가 사모하게 되었다. 조사는 이를 법대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는데 선묘는 “귀국하실 때 꼭 들러주소서”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쾌히 승낙한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에서 수학하던 중, 당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법하려는 형세를 알고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선묘의 집에 이르렀으나 마침 출타 중이라 길을 재촉했다. 한편 귀국 선물로 법의를 마련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중, 그가 다녀 간 것을 알게 된 선묘는 조사를 뒤쫓아 산동성 해안에 다다랐다. 그러나 바다엔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선묘가 선물을 바다로 던지며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게 해 주옵소서”하자, 해풍이 크게 일어 선물이 조사의 배 안으로 들어갔다. 선묘가 다시 “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소서”하며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이 되어 귀국길을 호위했고,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국난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고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 이르렀다. 지세를 살피니 과연 명산이나 이교(異敎) 500여명이 점령하고 막무가내로 자라를 양보해 주지 않았다. 이 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법력을 써서 무량수전 서편의 큰 바위를 공중으로 3번 올렸다 내렸다 하니 무리가 겁을 먹고 굴복했다. 이 자리에 건립한 사찰이 부석사이며, 이때의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렸다. 한편, 선묘룡은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자리에 안좌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었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榮州 浮石寺 三層石塔물  제249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출처:문화재청)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앞의 석등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국보  제19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북지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조사당 측면

조사당 연등천장

부석사조사당벽화 (浮石寺祖師堂壁畵. 국보  제46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선비화

응진전

자인당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榮州 浮石寺 石造釋迦如來坐像.보물  제1636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자인당에는 거의 같은 규모의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2구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이며, 1구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의 도상특징을 보여준다.
이 삼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1.5km 지점에 위치하는 東方寺址에서 1957년에 옮겨 온 것이다. 이들 삼존 중 비로자나불 2구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으로 지정되었다. 자인당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두 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좌 뒷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은 특이한 예로 주목되며, 높고 화려한 대좌는 양감이 강조된 불상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을 보여주고 있고, 보물 제220호와 같은 사지에 유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삼불(삼신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출처:문화재청)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榮州 北枝里 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2호.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1 부석사)

원래 부석사 동쪽 산 너머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서 양식상 동일한 조각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의 여래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두 팔이 가슴쪽으로 올라가 있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모양을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당시 유행하던 얇게 빚은 듯한 촘촘한 평행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대좌(臺座)의 가운데 부분은 8각인데 각 면에는 공양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서쪽의 여래상은 동쪽의 여래상보다 좀 더 당당하며 불신의 선들도 부드러운 편이다.
이 불상들은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예로서 단아하면서 인간적인 형태, 평행의 옷주름선, 몸의 자세 등에서 당대 불교사상의 특징과 불상양식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출처:문화재청)   

 

단하각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榮州 浮石寺 五佛會 掛佛幀.보물  제1562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이 괘불은 1745년에 조성된 오불회도(五佛會圖) 형식의 괘불로서, 부석사에 전래되어 오던 1684년작 괘불을 청풍 신륵사로 이안하고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1684년작 괘불의 도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노사나불을 새롭게 첨가하였다. 즉 가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을, 세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배치하여 삼세·삼신의 오불회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중심은 영산회상의 설주(說主)인 석가모니불이다. 이와 같은 삼신·삼세불화 형식은 일본 주린지(十輪寺) 소장 오불회도(15세기)와 안성 칠장사 오불회괘불탱(1628년)에서도 볼 수 있어 조선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 정착한 도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오불회 형식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단행된 종단의 통폐합에 따른 삼신불, 삼세불 사상의 결합으로 나타난 도상으로, 이 괘불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대형의 군도형식의 불화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인물묘사에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는 등 18세기 중반경의 격조 높은 불화양식을 대변한다. (글.사진 출처:문화재청)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榮州 浮石寺 高麗木板.보물  제735호.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榮州 浮石寺 高麗木板)은 부석사에 있는『화엄경』정원본 40권, 진본 60권, 주본 80권 등 3종의 대방광불화엄경을 나무판에 새긴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정원본(貞元本)은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40권을 가리키고, 진본(晋本)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주본(周本)은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80권을 가리킨다. 이 판은 모두 합쳐 634판이며 한 줄에 34자씩 글자를 배열한 특이한 형식이다.
13∼14세기경 거란에서 불경을 수입하여 나무판에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거란본 계열의 각판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글.사진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