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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금탑사(高興 金塔寺)

노촌魯村 2014. 11. 16. 23:32

 

 

 

위치 :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금탑로 842 법당

포두면 봉림리 천등산(天燈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寺刹)이다.

천등산의 천등이란 옛날 가엽존자(迦葉尊者)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를 한 것을 이르는 것이며,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印度)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천등산 금탑사를 불연(佛緣)이 오래된 유서 깊은 사찰로 여기게 하고자 하는 강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14 흥향현 불우조(佛宇條)에 사명(寺名)조차도 보이지 않던 금탑사가, 조선 후기의 지리지(地理誌)인「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전라도 권 5 하 흥양현 사찰조에 사명이 비로소 있을 뿐 아니라 대동지지(大東地志) 흥양산수조(興陽山水條)의 천등산의 세기(細記)에 신라문무왕 태봉금탑사(新羅文武王 胎封金塔寺) 기록이 별안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전혀 기록이 없던 사찰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사명이 나타나고 또한 색다른 기록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금탑사의 초창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에는 존재했던 사찰로 보여진다. 

임진왜란(아마 정유재란이 옳을 것이다)때 섬 오랑캐로 인해 불 타 무너졌다고 한다. 이 피해로 폐사찰이 되어 단지 1층 석탑만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30년(1597) 궁현,옥순대사(弓弦,玉淳大師)가 중건했다가 숙종 18년(1692) 불에 타버리고 극락전(極樂殿)만 남았다고 한다. 

설암추붕(雪巖秋鵬 : 1651~1706)이 금탑사에 와서 칠언율시(七言律詩) <금탑사구호(金塔寺口號)를 남겼으며 고흥 출신인 영해약탄(影海若坦; 1668~1754)도 오언시(五言詩)인 제금탑사(題金塔寺)를 지었다. 헌종(憲宗) 1년(1835) 인릉(仁陵),순조(純祖)와 관련되어 사찰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헌종 11년 1845 화재를 만나 일시에 12개의 범우(梵宇)가 불타버리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사찰은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답(寺畓), 법기(法器) 등 4물(物)을 방매하기도 하고 장발로 퇴속하기도 하고, 다른 사찰로 승려가 이거하기도 하여 단지 노약한 승려 10여인만이 남아 있게 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금고(金鼓)란 법기를 방매하기도 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쇠락해져 갔다.  

  이 때 유명비구(有明比丘)가 철종 12년(1861) 비장한 각오로 신심(信心)을 일으켜 먼저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시주물을 얻어 법기를 사들여 법당에 걸어놓게 되었다. 헌종 13년(1847) 대법당(大法堂; 極樂殿) 후불정(後佛幀)을 연대암(蓮臺庵)에서 조성하여 극락전에 봉안하였다.(출처:고흥군청)

 

 

금탑사 극락전(金塔寺極樂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전남 고흥군 포두면 금탑로 842 (봉림리))

금탑사는 천등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가 지었으며, 처음 이곳에 절을 지을 때 금탑이 있었다 하여 금탑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정유재란(1597) 때 불탄 것을 선조 37년(1604)에 다시 지었으며, 수 백인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헌종 11년(1845)에 천재지변에 의해 절이 기울어 그 다음해 절을 다시 지었거나 또는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금탑사 극락전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아미타불들 모시는 법당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1층이며,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금탑사 극락전은 공포와 그 밖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말기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문화재청)

 

 

 

 

 

금탑사 괘불탱(金塔寺掛佛幀.보물  제1344호.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금탑로 842 (봉림리) 

금탑사괘불탱은 옆으로 긴 폭에 삼세불과 주요 협시보살을 그린 독특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는 괘불이다. 크기는 길이 506㎝, 폭 648㎝로, 사천왕 등의 권속을 배제하고 주요 협시보살만으로 구성된 간략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삼세불은 화면을 가로로 3등분하여 큼직하게 그려져 있고, 상단과 하단으로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본존은 원만한 얼굴에 귀·눈·입·코 등이 작게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옆으로 퍼져 있으며,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어깨는 각이 지게 표현되어 있으며, 발목에는 치견(侈絹)이 장식되어 있다.
괘불탱을 보관하고 있는 괘불궤는 1697년에 제작된 것으로, 괘불보다는 약100여년 전에 만든 이른시기의 것이다.
조선 정조 2년(1778년)에 비현과 쾌윤이 함께 그린 이 그림은 작은 이목구비의 표현, 옆으로 퍼진 육계에 큼직한 정상계주, 각이 진 어깨, 발목의 치견장식 등에서 18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출처:문화재청)

 

고흥 금탑사 비자나무 숲(高興 金塔寺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239호.전남 고흥군 포두면 금탑로 842 (봉림리))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피고, 길고 둥근 열매는 다음해 가을에 익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고흥 금탑사의 비자나무 숲은 천등산 중턱에 있으며, 금탑사가 세워진 선덕여왕 6년(637)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높이는 10m 정도이고 모두 같은 시기에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흥 금탑사의 비자나무 숲은 금탑사와 관련되어 심어진 것으로 보여 조상들의 문화생활 일면을 볼 수 있는 오래된 인공림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출처;문화재청)

고흥군 군청 소재지인 고흥읍으로부터 남쪽으로 15.5km 거리에 해발 550m의 천등산이 있으며, 그 동쪽 산허리에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금탑사가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포두면 봉림리 700번지이다. 이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아랫편 입구의 계곡과 윗편 산지의 사면에 걸쳐 표고 190 ~ 410m 범위내 39,937평에 집단적으로 3,313주가 분포하고 있으며 천등산은 북위 34°32′50″, 동경 127°17′30″범위에 위치하고, 북동쪽은 포두면, 동남쪽은 도화면, 서쪽은 풍양면을 이루고 있다. 금탑사의 뒷편에 있는 비자나무숲의 수고(樹高)는 8 ~ 14m에 이르고 가슴높이 둘레는 16cm에서 121cm에 이르고 있다. 계급별로는 50cm이하가 31.4%이고 100cm 이상이 17.2%인데 대하여 51 ~ 100cm 범위의 비자나무는 51.4%로서 절반을 넘고 있고 또 91cm이상 121cm까지가 28.6%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볼 때 수령은 최고 100여년생으로 추정된다. 이 비자나무숲의 다른 한편에는 140cm되는 것도 발견되었다. 자연생이 아니라면 1800년대 중엽이나 말엽에 처음으로 심은 듯 하고 그 후 하종갱신 된 것이 있어 50cm이하가 31%나 된다. 비자나무는 상록침엽교목으로 자생지는 산록곡간지이고 분포는 수직적으로 표고 150 ~ 700m, 수평적으로는 전남북, 경북까지이고, 지리적으로는 일본(日本) 사국(四國), 구주(九州)이다. 목재는 치밀하고 심재가 황색을 띄고 있는데다 독특한 향기와 광택이 있어 바둑판, 조각재, 의장재 등에 값있게 쓰여지고 있으며, 종자는 기생충 구제용으로 생식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비자나무를 나자식물강 또는 아강으로 취급하고 있으나, 나자식물은 계통상, 단원적으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식물군의 종자형성 단계만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형태적으로도 나자식물은 분류군이 아니며 유관속식물의 진화과정에서의 한 단계이고 현생종보다 화석식물에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는 비자나무는 중국에 분포해 있는 2개종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서 일본에 분포해 있는 비자나무와 같은 종으로 취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비자나무가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었다면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초가 될 것인데 이를 증명할만한 자료가 없다. 우리나라에도 자생하고 있었다면 어디인가 그 집단림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어야 할 터인데, 분포북한지로 보는 백양사의 비자림처럼 집단적으로 성림되고 있는 곳은 대부분 사찰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어서 이러한 수림을 자연림으로 보기는 어렵다.
천등산 일대의 토질은 중생대 백아기의 중성화산암과 산성화산암이고, 포두면 옥강리와 남성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세동리와 봉림리는 불국사통의 화강암이 형성되어 있어 천등산 암석로출지는 여기에 속하며, 길두, 남촌, 송산, 상포리 일대는 중성화산암지대이며, 장수리 근처만이 반암등으로 되어 있다. 지형은 고흥반도가 전라남도 동남단에 돌출한 와우반형이고, 산세는 노령산맥의 동축지맥이 벌교에서 뻗어내려 동으로 팔영산(608.6m)과 해창만, 천등산(550m)을 이룬다. 천등산과 미인치에서 발원한 하천은 금지제를 거쳐 포두천(8.4km)을 이루어 해창만간척지에 이른다. 고흥반도는 비교적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으며 큰 강이 없다.연평균기온은 13.7℃, 연평균강수량 1,308mm, 연평습도 73.4%이고, 최고온도와 최저온도는 1977년에 36.4℃와 -12.4℃를 기록하였다. 천기일수는 맑음 123일(33.7%), 구름 127일(34.8%), 비 94일(25.8%), 안개 2일(0.5%)의 연평균을 나타낸다. 천등산과 비자나무숲의 주위 식물상에 대한 식생형을 목본(木本)과 초본(草本)으로 구분하여 목본을 낙엽교목 (落葉喬木), 낙엽관목(落葉灌木), 상록교목(常綠喬木), 상록관목(常綠灌木), 낙엽만경(落葉蔓莖), 상록만경(常綠蔓莖), 기생식물(寄生植物), 대나무과 등으로 초본을 상록초본(常綠草本), 다년생초본(多年生草本), 만경다년생초본(蔓莖多年生草本), 1년생초본(1年生草本), 2년생초본(2年生草本), 만경1년생초본(蔓莖1年生草本), 만경2년생초본(蔓莖2年生草本)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면 목본에서는 낙엽교목이 59종으로 낙엽관목 57종과 유사하고 상록수가 42종이며, 기생식물(寄生植物)로 동백나무겨우살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초본에서는 다년생초본이 246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1년생초본 103종, 만경인 것이 10종이며, 바위손, 바위고사리, 봉의 꼬리, 도깨비고비, 비늘고사리, 콩짜개덩굴, 콩짜개난, 보춘화 등 상록초본이 30종으로 나타났다.
천등산의 특산식물로는 금탑사 후사면 계곡의 비자나무림하의 석산(Lycoris radiata)의 대군락이다. 이곳에서는 독무릇으로 부르고 있는데, 무릇 類는 백합과 식물이고, 석산과는 다르다. 석산과 함게 사찰 주위에 개상사화도 분포하고 있으나 그 상태가 빈약하고, 석산은 절 위쪽 천등산 동사면을 따라 표고 200 ~ 350m까지 대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같은 지역의 암자터 주위에 오갈피나무와 섬오갈피도 자생하고 있다. 정상의 암석 노출지에서는 광양 백운산의 산특식물(産特植物)로 알려진 백운기름나물이 자생하고 있다.(출처:고흥군청)

 

 

비자나무 숲과 단풍이 한폭의 수채화 !!! ??? 

 

 

 

 

 

 

산다화(아기동백꽃) 

 

  

금탑사 가는 길

 

단풍이 좋아 인증사진 한 장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