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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선생(趙宗道先生) 열녀증정부인(烈女贈貞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쌍절각(雙節閣)

노촌魯村 2016. 3. 6. 16:48




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공 조 종 도 (趙 宗 道).1537(중종.32) ~ 1597(선조.30)

조선조중기의문신. ()는 백유(伯由)요 자호를 대소헌(大笑軒)이라 하였으며 어계선생의 오세손이요 참봉공 언()의 장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용모가 빼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8세에 시문을 완성할 정도였으며 달팽이 시는 많이 회자되었다. 9살적에 은군자였던 정두(鄭斗)선생께서 글을 배웠으며 15살 때에는 지방시에 선발되었다.

학문은 조남명 식(曺南冥 植) 노옥계 진(盧玉溪 )양선생의 문하에서 청문(請文)하였으며 또한 이퇴계(李退溪)선생의 문하에서 강론하여 성리학에 밝았으며 제자백가서 등은 한번 보기만 해도 기억하는 재주로 통달했으며 문장 또한 도도하였다.

명종13(1558)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73(선조.6)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을 제수 받았다. 재직 중 유서애 성룡(柳西崖 成龍) 김학봉 성일(金鶴峰 誠一) 등 여러 현사들과 교의가 두터웠었다. 그 후 장예원 사평(掌禮院 司評)을 지내고 양지(陽智) 현감을 배명 받았으며 1587년에 금구(金溝)현령으로 전임되어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그곳에 현존해 있다.

1592(선조.25)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제수 받고 이어 단성현감으로 전임1596(선조.29)에 함양군수를 배영 받았음.

1592(선조 .25) 봄에 공이 서울에 들렀다가 얼마 후 임진란이 발발한 것을 알았다.

이송암 로(李松巖魯)와 함께 정승이었던 유서애(柳西崖)선생을 찾아본 후 돌아오는 길에 이로(李魯)와 약속하기를 창의(倡義)에 앞장서서 통문(通文)을 내어 모병토적(募兵討賊)하기로 하고, 만일 일이 여의치 않으면 뜻을 같이하는 동지(同志)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으면 놈들의 욕()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하니

이로(李魯)가 말하기를 누구와 같이 죽을 것인가?”하고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다른 사람은 불가(不可)하지만 정덕원(鄭德遠), 김지해(金志海), 박덕응(朴德凝) 등은 나와 함께 죽음을 같이 할 사람들이다."고 하였다. 마침 김학봉 성일(金鶴峰 誠一)이 초유사(招諭使)로 함양으로 내려왔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어 학봉(鶴峰)은 용기백배한 듯 반기면서 그들을 막하(幕下)에 머물게 하였다.(東儒師友錄중에서)

김학봉(金鶴峰)이 공을 의령군의 임시 군수로 발령하였다. 공이 도착해본 즉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군 행정을 수행하고 있어 공은 그에게 직분을 넘겨주고 함양으로 돌아왔다.

김학봉(金鶴峰)을 보고 말하기를 "소문에 의하면 서울과 평양이 모두 함락되고 몽진(蒙塵) 길에 오른 왕의 행차는 이미 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고 하니 나라는 이제 망했다하고는 강물을 굽어보고 투신 자결하려 하니 학봉은 그를 말리면서 말하기를옳지 못하다. 소문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헛되게 죽는다면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저 강물에 맹서 하노니 내가 죽기 두려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요하니 공이 수긍하였다. 그때 학봉은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읊었다.

 

"촉석루 중의 셋 장사, 술 한 잔 손에 들고 남강을 가리키네. 도도히 흐르는 저 강물아, 물결 끊이지 않은 한 혼백 죽지 않으리!"

 矗石樓中三壯士, 一杯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그때 왕은 의주로 행행(行幸)하였다. 공에게 의병의 공()으로 첨정(僉正)의 관직이 상() 주어졌다.(神道碑중에서)

 

1596(선조. 29)에 함양군수에 취임하였다. 1597(선조.30)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왜군이 전라도 방면을 침입해 왔다. 공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청()하여 일군(一郡) 병민(兵民)을 산하(傘下)에 소속시켜 죽음으로써 항전(抗戰)하기로 하고, 병민(兵民)을 거느리고 험악한 지대(地帶)를 점거(占據) 사수하였다. 그러던 중에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안의현감 곽준()과 함께 성루(城壘)를 보완하고 작전(作戰)을 꾀하던 차에 공이 함양으로 체임(遞任)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성(守成)은 위험하고 또 관수(官守)도 없으니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 이미 죽음으로서 국가(國家)를 지키고자 맹세하였고, ()이 이미 육박(肉迫)하였는데 의리상(義理上) 떠날 수 없다.”고 하니 자제(子弟)들이 처음에는 빨리 길을 떠나려고 하다가 공의 의()로운 말을 듣고 모두가 뒤를 따랐다.

주장(主將) 백사림(白士霖)"()이 높고 험준(險峻)하니 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더니 적()이 성()에 박도(迫到)하자 밤에 몰래 성을 헐고 달아나 버려 성이 함락되었다.

곽준()이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하겠소.”하고 물으매, ()이 답하기를 "죽을 따름이다."하고 곧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서향재배(西向再拜)하고 곽준()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충의(忠毅)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서원(書院)은 함안(咸安) 덕암(德巖)에 있고, 충렬사(忠烈祠)는 안의에 있으며 황암(黃巖)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일찍이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지킬 때 적의 선봉이 척후(斥候)를 보낼 즈음, 학유(學諭) 윤선(尹銑), 진사(進士) 박천우(朴天佑)와 같이 밤에 술을 마시다가 분개(憤慨)한 시구는 그의 지조의 본바탕을 여실히 나타냈다 하겠다.

공동산(崆峒山) 밖에 사는 것이 비록 즐거우나.

(), () 성중(城中)에서 죽는 것 또한 영화(榮華)롭네.

崆峒山外生雖樂. 巡遠城中死亦榮.

(海東名臣錄중에서


배(配)는, 정부인(貞夫人)전의(全義)이(李)씨로 판서(判書)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의 딸로서 공과 같이 황석산성에 있었다. 성이 함락되자 두 아들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조씨(趙氏)가문을 대를 끊어지게 할 수 는 없느니라. 나는 의리상 떠날 수 없다.”하고 공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대소헌집 한권이 세전(世傳)한다.
묘소는,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건좌이며 정부인(貞夫人) 전의(全義) 李씨와 합장이다.


출처: 함안조씨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