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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려(高麗) 전서공(全書公) 금은(琴隱) 조열선생(趙悅先生) 신도비(神道碑)

노촌魯村 2016. 3. 6. 16:22


고려(高麗) 전서공(全書公) 금은(琴隱) 조열선생(趙悅先生) 신도비(神道碑)


조 열(趙 悅)

전서(典書)공 조 열(趙 悅)
공은 고려 말에 태어나셨으며 공조전서(工曹典書)의 벼슬을 지나셨다.
공양왕 삼년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당시 시중의 자리에 있으면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계획아래 원주에 진을 치니 공이 고려의 사직이 위태로움을 느끼고 상소도하고 강력히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공들을 멀리로 내치었다.(成 虛白堂 俔의 記文중에서)
조선 태조가 공양왕을 폐하여 간성(干城)에 봉군(封君)하니 공은 영남에 게시면서 이 소식을 듣고 천리 길을 머다 않고 간성까지 가셔서 왕을 뵙고 안부를 살폈다.(출처 같음)
조선 태조 갑술년에 한양 궁이 완공되었다. 태조가 본대 공이 거문고를 잘 타는 것을 알고 예를 갖춰 친서로써 낙성연에 초대하니 공은 사양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고 누추한 옷차림으로 궁정에 들어서니 태조가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번 기회에 옛 친구를 위하여 한번 재예(才藝)를 보여 줄 수 없을까 하니 공이 왈 “지난해 전왕의 연회에서도 타지 안 했던 사실은 왕도 보았을 것인데 만약 지금 왕의 청을 받아들인다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을 지하에서 뵈오리이까?”하였다.(출처 같음)
정종이 상왕(태조)의 초상화를 만들고자 공의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 남을 듣고 친서로 공에게 청하니 공은“공민왕의 초상도 그리지 안 했는데 이 늙은 천한 몸이 어찌 감히 명을 받잡겠습니까?”하였다.(출처 같음)
공이 공민왕 시절에 국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홍만은 재(洪晩隱 載)와 이모은 오(李茅隱 午)와 함께 삼가(三嘉)의 운구(雲衢:지명)에 모여 서로 위로도하고 슬프게 시를 읊고 또 노래 부루니 사람들이 은(殷)나라의 기자(箕子)와 주(周)나라의 백이숙제의 절의(節義)라 하였다. 언제나 죽장망혜로 두심동을 오가며 생을 마치니 뒷날 사림이 그 곳에 사당을 지워 제사를 모셨다.(杜門遺事에서)
조선조에서 옛날의 관작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셨다.(위와같음)
공이 처음 함안의 평광리에 사시다가 원북동으로 이사 하셨다. 거문고를 잘 타고 그림도 잘 그리셨으며, 달 밝은 밤이면 그 소리가 멀리에 울렸으며, 그림 또한 세상에 전한다 하였다.(咸州誌에서)
일찍이 친구들과 회합하여 연구시(聯句詩)를 지으니 이르데 "깊숙한 대밭 속 몇 떨기 꽃 산촌 적막한 집 곱게도 꾸몄네. 방에 들어가 보니 두루미에 술이 가득 벼슬하고픈 생각 비단처럼 엷어지네.”하였다

 (李采 神道碑銘中에서)
초배(初配)는, 곤양(昆陽)전(田)씨며 후배(後配)는, 아산(牙山) 장(蔣)씨였다.
묘소는,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동점동 건좌임.

恭讓王三年李侍中留陣原州工曺典書趙悅上疏直諫王不聽遂逐出悅等於遠方
(出成虛白堂俔 記)
恭讓王處干城趙悅在嶺南聞之覲王干城(上同)
太祖甲戌漢陽宮成王素知趙悅之善琴以故人禮作手札請之公終難固辭乃着麤袍
 入宮庭王執手曰今番落成爲故人一彈琴公曰曾年前王之
 慶宴諫而不彈王亦參見矣今若從王所請他日何面目謁先王於地下乎(上同)
定宗己卯重摹上王御容王聞趙悅之善畵乃以手札請之公曰昔年恭愍先王重摹時
 不從王命老父雖賤今何敢承命乎(上同)
恭愍時見國事日非棄官歸鄕麗亡與洪晩隱載李茅隱午會于雲衢相與悲歌哀詠
 人比之麥穗採薇之歌常以竹杖芒鞋互相往來于杜心洞因終焉後士林立祠其地
(出杜門遺事)
聖朝龍興以舊官累徵不起(上同)
先生初居咸安平廣里後移院北洞善琴畵每月夜彈琴聲聞數里畵亦流傳於世云矣
(出咸州誌)
嘗有盍簪聯句曰幽篁園裏數叢花潤色山村寂寞家入室更看罇有酒宦情從此薄於
紗(李采神道碑銘중에서)

(출처:함안조씨 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