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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무진정(無盡亭)

노촌魯村 2016. 3. 6. 21:39




무진정(無盡亭.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명종 22년(1567)에 무진 조삼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우고, 조상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고 하였다.
무진은 조선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집의 겸 춘추관편수관을 지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조 삼(趙 參)

집의(執義)공 조 삼(趙 參), 1473(성조.4)(?))

조선조 중기의 문신. ()는 노숙(魯叔)이요 호는 무진정(無盡亭)이다. 어계선생의 손자요 진산공 동호(銅虎)의 셋째아들로 1473(성종.4)에 출생하였다.

1489(성종.20) 17세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507(중종.2)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함양(咸陽) 창원(昌原), 대구(大邱), 성주(星州), 상주(尙州) 등의 목사(牧使)와 부사(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성정(性情)이 독서를 좋아했다. 어느 날 아침 밥상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책 읽기에 열중했다. 계집종이 식사 끝난 것으로 짐작하고 상을 치웠는데, 점심 역시 그렇게 했었다. 해 질 녘에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 "오늘은 왜 밥상을 들이지 않느냐?" 물으니 부인이 사연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공이 크게 웃으면서 참으로 몰랐었구나!하였다.

공직에 근무하면서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소문이 넓게 났었으며 백성을 위한 선정(善政)에 헌신(獻身)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이 자그마한 정자 한간을 함안의 여항산 아래에 지어 무진정(無盡亭)이라 현판을 걸고 관계를 물러난 후 거기에서 기거하였다.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약기(略記)하면

"선생은 다섯 고을 관장(官長)을 두루 역임하고 일찍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정자(亭子)가운데 높이 누워 청산백운(靑山白雲)을 병풍(屛風)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손님 삼아 증점(曾點)과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읊고 휘파람 불며 한가로이 소요(逍遙)하는 느긋한 이 즐거움은 비록 많은 녹봉(祿俸)을 받는 경상(卿相)과도 바꾸지 않으리라.

대체로 벼슬이 영화(榮華)롭기는 하나 욕()됨이 따르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서슴없이 물러남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또한 선생은 앞산을 바라보면서 신후계(身後計)를 삼았으니 이는 천명(天命)을 안 소이이다, 천명(天命)을 알았기에 서슴없이 물러났고, 서슴없이 물러났기에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니 정자(亭子)와 선생의 이름이 다 함께 무진(無盡)할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그리고 당감(唐鑑:당나라 역사책)을 보았는데 이는 선생께서 예조좌랑으로 재직할 당시 중종(中宗)께서 공의 바른 학문을 아름답게 여겨 상()으로 하사(下賜)하신 것이었다.

또 충재 권벌(沖齋權橃)공의 교유록(交遊錄)을 보면 선생과 함께 교유(交遊)하였던 기록이 있다.

문집(文集)으로 괴산세록(槐山世錄)이 전해지고 있다

(), 성산 (星山)()씨 절도사 거인(居仁)의 딸이며 묘소는, 함안 성산 유좌이다. (출처:함안조씨 대종회)

 



 

 










함안낙화놀이(咸安 落火놀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

함안 낙화놀이는 함안면 괴항마을에 전승되어온 고유의 놀이로 매년 4월초파일 마을입구 이수정에서 개최되어 왔으며, 그 유래는 정확히 전하여지지는 않지만 문헌과 조사를 통해 본 결과 17세기 조선중엽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함안면민을 중심으로 한 함안낙화놀이보존위원회가 결성되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낙화놀이의 형태는 마을 자체에서 제작한 숯가루를 한지에 돌돌말아 낙화를 만들어, 이수정에 준비한 줄에 낙화를 걸어 불을 붙임으로써 숯가루가 불을 머금고 타면서 바람에 날리는 장관을 연출하는 함안군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부자쌍절각(父子雙節閣)

조준남(趙俊男)

참봉(參奉)공 조준남(趙俊男), 1547(명종.2)1596(선조.30)

1547(명종.2)-1596(선조.30)

조선조 중기의 효자 자()는 사언(士彦)이며 어계선생의 오세손이요 생원공 물()의 장자이다.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다.

젊어서부터 의기(意氣)가 넘치고 감개무량(感慨無量)한 성품(性品)이었으며 지조(志操)가 드높아 결코 취해서는 아니 될 것은 취하지 않았으며, 세속 따라 행동 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정유년의 왜란에 집의공(執義公)의 묘가 왜적(倭賊)에게 발굴(發掘) 당하니 공은 칼날을 무릅쓰고 적진(敵陣)에 뛰어 들어 파 헤쳐진 관()을 흙으로 덮으니 적이 정의(正義)롭다. 하여 차마 해 치지는 않았으나 항복(降服)하라고 위협(威脅)하니 공은 대성 통곡하면서 왜적(倭賊)을 꾸짖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전복(顚覆)하고 또 선대의 분묘(墳墓)를 발굴하니 의리(義理)상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이다. 어찌 구차하게 너희에게 순종(順從)하며 살기를 바라랴? 하면서 북향재배 하고 허리춤의 칼을 뽑아 무진정(無盡亭)상에서 자진(自盡)하니 적들이 서로가 돌아보면서 탄복하고 옷을 벗어 시체를 덮어 가리고 달아났다. 뒷날 사람들은 무진정 (無盡亭)아래서 나는 죽순이나 나물을 캐먹지 않았다. 숙종 병술년(1706)에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이 내려 정묘호란 때 순절(殉節)한 아들 증() 참판공 계선(繼先)과 함께 부자 쌍절각(雙節閣)을 함안 괴산리에 건립하였다.

13충의 한 분이며 승지공(承旨公) 파의 파조(派祖)이다.

증직(贈職),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이다.

(), 재령(載寧)()씨 증 참판 경성(景成)의 딸이며

묘소는, 함안 법수면 덕산 묘좌임. (출처:함안조씨 대종회)

    

조계선(趙繼先)

선전관(宣傳官)공 조계선(趙繼先), 1570(선조.3)1627(인조.5))

조선조 중엽의 무관. ()는 효백(孝伯)이며 증 승지공(承旨公)준남(俊男)의 장자이다.

1603(선조.36)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 되었다.

체구가 크고 훤칠하며 침착하고 말이 적었으며 또한 용맹스롭기는 출중(出衆)하였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 시절에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혹 사람들이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면 문득 말하기를 "무도한 나라에서 녹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지금이 어찌 관로에 나아갈 때냐?" 하였다. 인조반정(反正) 후 처음으로 봉직하였다.

이완(李莞)이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재직 시 공을 참모로 불러 병사 업무를 맡겼더니 밤낮 없이 업무에 진력했다. 정묘년 정월에 청군이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쳐들어옴에 공은 부윤 이완(李莞)과 변방 수령 십여명과 함께 부하를 인솔하여 적과 전투하여 그들을 수없이 사살했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은 다되어 판관(判官) 최몽량(崔夢亮)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이완(李莞) 역시 자진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는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증직(贈職),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訓練院都正)이다.

초배(初配), 남평(南平 )()씨 감사 득()의 딸이요

후배(後配), 강양(江陽 )()씨 판돈령 천수(天受)의 딸이다.

묘소는, 함안 법수면 두배 을좌임. (출처:함안조씨 대종회)

 忠奴大甲之碑(충노 대갑 지비)

이 비석은 주인인 조계선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한 노비 대갑이 조계선이 전사를 하게되자 의주에서 돌아와 부음을 전하고  "주인을 난에서 구하지 못하고 어찌 혼자 살면목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고는, 검암천에 투신을하여 자결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