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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 채미정

노촌魯村 2016. 3. 6. 10:01


어계 조려가 귀향 후 여생을 보낸 정자, 채미정

함안 채미정(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길 104-1)
조선 단종 시 생육신의 한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 위를 차지한 세조의 처신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낸 정자이다. 1693년에 창건하였고 1954년에 재건(再建)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으로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정면에 방형 연못이 있고 북쪽절벽위에 청풍대(淸風臺)에 문풍루(聞風樓)라는 6각정이 있다.




함안군청의 서쪽 삼십리 지점에 무게 있는 산이 마치 품격 높은 군자와 은사가 전야 속에서 천지가 다하여도 그 뜻을 변치 않을 듯 서 있으니 바로 백이산 이다. 산의 서쪽은 선조 어계선생께서 사셨던 고장이다. 숙종 계미년에 영남의 사림이 사당을 그곳에 건립하여 선생과 경은 이선생 관란 원선셍 동봉 김선생 문두 성선생 추강 남선생 등의 향례를 모시고 있다.

사당의 동쪽에 백이산이 바로 마주하고 있어 육선생의 절의가 백이와 충분히 견줄 수 있기에 서원 명을 서산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동쪽의 강당 밖에 연못과 암석의 경관이 뛰어나 모두가 의논하여 정자를 세워 채미정이라 호명 한 것은 선생께서 일찍이 읊은 구일 등고시를  백이의 서산 채미가에 바유 하여 선생을 사모하는 정에서  그 이름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 된다.

육 선생께서는 단종이 선위(禪位) 한 후 모두가 선왕의 영(靈)에 성의를 바치며  자취를 감춰 은거하면서 천지와 인생의 법칙을 밝혔으며 교화(敎化)를 천 백대에 부식(扶植)하였으니 진실로 백이에게 조금도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또한 어계선생은 처음부터 단종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으셨으며  김시습 처럼 선왕조의 대우도 받지 아니하셨다. 만약 선생의 문장과 깊이 통달한 학문의 실력을 당시에 발휘했더라면 성취 못 할 바 없었음에도 산수간에 의지하며 낚시에 몸을 맡겨 늙어 인생을 마쳐도  아무런 후회 감은 없으셨으니 돈독히 믿는 도의심과 스스로 깨닫는 밝음이 없었다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었으리요?

함안은 진정한 선생의 고향이다. 후손이 모여 거주하며 선생과 선대의 묘소가 서로 마주하여 바라보이는 곳이요 서원과 정자사이는 모두가 선생께서 지팡이를 끌고 조석으로 소요하시던 곳이다. 대저 백이산이 타향에 있지 않고 함안에 있으며 또 다른 곳이 아닌 선생의 마을에 있다. 산의 이름을 백이라고 한 것은 선생의 출생과 연관을 지었던 것 같으며 선생의 내면적인 금심과 사려(思慮)는 감개 침울하여 중양절에 산에 올라 국화꽃송이 꺾어 하늘을 우러러 옛일을 회상하고 소요하며 읊은 시에 태평성대를 볼 수 없는 것을 한탄하여 표현하신 그 뜻은 자연히 발견할 수 있으니 또한 백이와 숙제의 채미가와 심사는 같으셨다. 여기 서원에 왕래하는 많은 선비들이 다 같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하여 또 다시 이 정자를 건립하여 치성을 지극히 하는 것은 남기신 발자취를 게양(揭揚)표명(表明) 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추상케 하며 오래도록 더욱 더 새롭게 하려함이다.

기묘년에 나 영석(祏榮)은 의령현감으로 재직 중 여기에 와 선대의 사당에 절을 올리고 채미정에 올라 등고시를 읊고 백이산을 바라보며 선생의 유풍을 가슴속에 새겼으며 여러 종족들과 함께 정자아래 회동하여 돈독히 정의를 나누고 친근히 술을 마시며 시를 엮으며 즐겁게 지냈었다. 그 후 종족들께서 정자의 기문을 짓기를 명하니 혼자 생각하기를 만약 이 글이 문설주위에 게양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선생의 후손의 작품인 것을 알게 된다면  이 얼마나 영광이며 다행한 일이 아니겠느냐? 사양하지 않고 이 기문을 쓴다


九世孫 榮
咸安郡治西三十里有山隱然如高人逸士處田畝而有窮天地不變之志者曰伯夷山

山之西有我先祖漁溪先生舊居之里也肅廟癸未嶺之章甫建祠里中以先生及耕隱

李先生觀瀾元先生東峰金先生文斗成先生秋江南先生幷享於是伯夷山直對于祠

宇之東推衍山名額曰西山書院謂六先生之節可配于伯夷也旣又直講堂東垣之外

有塘巖石之勝則相與謀搆一亭曰采薇漁溪先生嘗有九日登高詩君子以西山之歌

比之故亦借之名以寓其實也六先生蓋當端宗內禪之日皆心存靖獻隱身韜晦以明

其天經地緯民彛之則扶世敎於千百載則固已無愧於夷齊而若漁溪先生初無爵祿

於朝亦未嘗受知先朝如金東峰以先生之文章邃學出其所長以施用於當時無不可

者而顧乃自托漁釣放之於山巓水涯之間訖老於此死而無所悔豈非所謂信道篤而

自知明者歟咸安實先生之鄕邑也後裔聚族而居先生墓與諸先塋俱在松楸相望而

書院亭址之間皆先生杖屨朝夕徜徉之處也夫伯夷山不在於他鄕而在於咸安又不

在於他所而必在於先生之里山之得名似若以凝乎先生之出而先生內有憂思感慨

壹鬱登高岡而掇幽菊俯仰今古擲觸嘯詠歎虞夏之不可不覩而發之於聲詩以自見

其志其亦夷齊吁嗟謳吟之心也多士之嚮往者同之不足又立斯亭以致其缺盖將表

揭遺跡使人人者彷佛瞻想至於兪遠而彌新也歲己卯榮自宜寧往拜祠廟登斯亭

詠九日詩見伯夷山而挹先生之遺風與諸宗人大會亭下敦情親飮酒賦詩以樂之

旣歸諸宗人命之以亭記自惟若或以文字托命楣間使觀者知其爲先生之後孫焉則

榮且幸也遂不辭而爲之記(출처: 함안조씨 대종회)

채미정의 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