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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구미

단계 하위지 선생(丹溪 河緯地 先生) 묘소(墓所) 및 유허비(遺墟碑)

노촌魯村 2016. 4. 24. 16:51

 

2020.9.14 답사에서 촬영한 사진

단계 하위지 선생 묘소(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10길 7-21(죽장리 산 13-1))
묘소 주차장에서 묘소까지는 약 140m(죽장사(국보130호 죽장사5층석탑)에서 단계 하위지 묘소 주차장까지 2.3km)
단계 하위지 선생 유허비

2016년에 답사에서 촬영한 사진

단계 하위지 선생 유허비(丹溪 河緯地 先生 遺墟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 경북 구미시 선산읍 완전리 45-1번지)

이 비석은 조선 세조(世祖) 때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1387∼1456)의 굳은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한 유허비이다. 하위지는 세종(世宗) 20년(143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요직을 거쳤다. 세조가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자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신으로 탄로나 참형을 당하였다. 그후 숙종(肅宗) 때 억울함이 풀어지게 되어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함께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1.1m이고 너비는 45cm이며 두께는 17cm이다. 몸체는 화강석이며, 비의 전면에 '유명 조선 단계 하선생 유허비(有明朝鮮丹溪河先生遺墟碑)'라는 글씨만 기록되어 있을 뿐 비문이 없어 확실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선산읍)

             

비의 전면에 '有明朝鮮丹溪河先生遺墟碑(유명 조선 단계 하선생 유허비)'라는 글씨만 기록되어 있다

    

비문이 없어 확실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위지(河緯地) : 본관은 진양. 자는 천장(天章). 호는 단계(丹溪). 증조부는 하윤(河胤),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지백(河之伯), 아버지는 군수 하담(河澹),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1412년(태종 12) 선산 영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형제가 문밖을 나오지 않고 독서에만 열중하니 이웃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에서 세종을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문종 때 병으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는데,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 명신들이 수양대군에게 참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의 뜻을 버렸다.

세조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의 독촉이 심하여 부득이 벼슬에 나가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하여 받은 녹봉은 별실에 저장하여 두고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김질(金礩, 1422~1478)의 고변으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와 더불어 같은 날 참형을 당하였다. 후에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하위지의 형 하강지(河綱地), 아우 하기지(河紀地)·하소지(河紹地), 아들 하호(河琥)·하박(河珀)도 참사를 당하였다. 참형을 당한 뒤 하위지의 집 앞 개천이 3일간 붉게 물들었으므로 개천 이름과 하위지의 호를 단계라 부르게 되었다.

저술 및 작품  : 「청구영언」·「화원악보」에 시 두 수가 전하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객산풍편(客散風扁)하고 풍철(風徹)코 월락(月落)할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싯귀 (詩句)를 흣부르니/ 아마도 소인(小人) 득의처(得意處)는 이뿐인가 하노라

전원(田園)에 남은 흥(興)을 전나귀에 모두 싣고/ 계산(溪山) 닉은 길로 흥치며 돌아와서/ 아이야 금서(琴書)를 다스려라 남은 해를 보내리라<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