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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청도

청도읍성(淸道邑城)

노촌魯村 2016. 5. 16. 07:40


청도읍성(淸道邑城.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동삼리,동천리)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청도읍성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1570보(1880m)이고, 높이는 5자 5촌(1.7m)이었다고 하나, 일제시대 때 읍성 철거정책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었고, 지금은 성벽의 바닥과 일부만이 남아있다. 성의 평면형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동·서·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다. 청도읍성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당시에는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것이었는데, 조선 선조 23년(1590)에 돌로 고쳐쌓아 선조 25년(1592)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출처 :문화재청)









공북문 옹성(甕城성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린다. 그 안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어 성문을 호위하거나 방어를 강화할 때 쓰였다

공북루









 


 

 


성내지


형옥






마청


미복원 성벽



청도척화비(淸道斥和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9호.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비의 옆면에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긴 돌을 이어 붙인 네모난 구역안에 서 있는 비는 머릿돌은 얹지 않은 간결한 구조이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그 옆에도 작은 글씨를 새겼는데. 내용은 “자손만대에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이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땅에 묻혔으나 140년이 지난 지금 부산, 경남, 경북, 충북, 전남 등지에 20개 정도 남아 있다.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도주관(道州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청도군을 ‘도주’라고도 부른다. 객사 안에는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에 절하는 곳인 정청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고 갈 수 있는 숙박시설로 되어있다. 1670년 경인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정청은 화양면사무소로 사용되면서 바닥과 벽이 바뀌었다. 그러나 건물의 나머지는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관아터에는 지방업무, 민사소송을 보던 동헌이 남아 있으며, 이 건물 앞에는 역대 군수들의 선한 정치를 기린 비가 서있다. 또한 고종(재위 1863∼1907) 때 대원군이 외세침략에 대해 거부하는 의지를 새긴 척화비도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고려시대 청도군의 지명을 딴 도주관(道州館)은 1543년 중창됐다. 가운데 건물인 정당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던 곳으로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마다 배례하던 곳이다. 이 때문에 동헌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의 익공(翼工)집 양식인데 지붕을 따로 높게 올리고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해 높게 만들어 고준한 느낌을 준다. 양쪽에는 정면 6칸, 측면 4칸의 좌우익실이다. 숙소로 쓰이던 곳이다. 철거됐던 좌익실이 2005년에 복원돼 도주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보물 제323호.경북 청도군 화양면 동천리 285)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만들어둔 창고이다.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문화재청 자료)

 

청도동헌(淸道東軒.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3호.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헌길 15 (동상리))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하나로, 청도지방의 일반행정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조선 영조 13년(1737) 경에 지어졌고, 1956년 경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 원래 동향 건물이었다고 전해지나 옮겨 지으면서 서향으로 바뀌었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의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도주학원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화양초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의 하나로 청도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동헌은 아사(衙舍), 군아(郡衙), 현아(縣衙), 시사청(視事廳)으로 불리는데,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 즉 서헌(西軒)의 동편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동헌이라고 부른다.
1737년(영조 13) 경에 지어졌고, 1956년경 지금의 위치인 화양 초등학교 내로 옮겨 다시 지었다. 원래 동향 건물이었다고 전해지나 옮겨 지으면서 서향으로 바뀌었다.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4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2칸씩을 연결시켰는데, 대청 2칸의 뒤로는 누마루 2칸을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T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5량가의 초익공(初翼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상부 가구는 기둥 위에 보아지와 주두를 놓아 대량을 받았으며, 포대공을 세우고 종보와 중도리를 얹었다. 중도리간은 합판으로 반자를 하여 상부는 보이지 않는다.
동헌은 지방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성을 가진 건물이다. 현재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청도 동헌은 관아 건축의 귀중한 연구한 자료가 된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