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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김천

김천 청암사 수도암(金泉 靑巖寺 修道庵)

노촌魯村 2018. 8. 27. 14:39


수도산에는 청암사, 백련암, 수도암 등의 이름난 사찰과 암자가 있다. 수도계곡은 참선 수도장으로 유명한 신라시대의 수도암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수도산 북쪽 기슭의 골짜기를 불령동천이라 하는데 심산유곡을 따라 울창한 수목과 옥류가 어우러진 불령동천의 그윽한 풍치는 비경이다.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수도암 경내에는 삼층석탑과 약광전 석물좌상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수도계곡은 갖가지 비경을 품고 있다.

수도산(修道山)은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수도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1.9㎞,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수재마을에서 북북동 쪽으로 약 2.9㎞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정상부 높이 1,316.8m의 봉우리이다. 수도산은 백두대간의 대덕산 남쪽 부근에서 가야산을 향해 동남동 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인 가야수도지맥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봉우리로 동쪽에는 송곡령과 단지봉이, 서쪽에는 우두령이 위치한다. 수도산은 산지와 주변 계곡의 지형 경관이 아름답고, 유명한 사찰인 수도암이 산록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산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도암 대적광전에서 본 가야산(물결 위에 뜬 한송이 연꽃... ...)

수도암 대적광전 정면에는 가야산이 연꽃처럼 피어 솟아 있어 웅장하고 신성한 기(氣)를 발산한다. 수도암에서는 가야산을 연화봉이라고 부른다. 연화봉 앞에는 일자봉이 있어 연화봉을 받쳐 주고 있는데 연화봉은 공덕을, 일자봉은 평등한 지혜를 뜻한다고 한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307호) 

청암사 수도암에 모셔진 높이 2.51m의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네모나며 풍만하고, 긴 눈·작은 입·평평한 콧잔등에서 위엄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단정하고 강인한 느낌을 준다. 거구의 불상이면서도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특이한 손모양과 함께 당시 시대양식의 반영인 것 같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쪽은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다. 맨 위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연꽃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균형잡힌 모습을 나타내는데, 위축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며 탄력이 줄어든 점으로 볼 때 신라말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보살좌상(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菩薩坐像. 보물 제296호)

청암산 수도암 약광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54m의 고려시대 석불좌상이다.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단아한 모습인데 마모가 심해 세부수법을 자세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양 어깨에 걸쳐져 있는 옷의 주름은 도식적이고, 손모양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모아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덩쿨무늬·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4각형으로 윗부분에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을, 아랫부분에는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을 조각하였다.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형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생각된다.(출처 : 문화재청)

수도암 약광전 석불의 전설(1)

이 석불은 거창 땅 부처골에서 다듬어져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부처골에서 불상이 완성되어 운반하는 방법을 의논하는데, 난데없이 수염이 하얀 노승이 나타나 운반하기를 청했다. 노승은 돌로 된 불상을 등에 업고 쏜살 같이 달려 따라가던 사람들이 아 무도 따를 수가 없었다. 노승은 고개를 넘어 수도암 입구(대적광 전 자리)까지 와서 칡넝쿨에 걸려 넘어졌다. 노승은 고개를 넘어 수도암 입구(대적광전 자리)까지 와서 칠넝쿨에 걸려 넘어졌다. 노승은 화를 내고 수도산 산신을 불러 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데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게 하였으니 앞으로 이 절 주위에 칡이 일절 서식하지 못하게 하라." 고 호령하고는 어디론지 사라 져 버렸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서로의 얼굴들만 바라보다가 누군가 먼저 "부처님의 화신(化身) 이다." 고 말하니, 모두들 노승이 떠난 곳을 향해 절을 하고,이 사찰을 짓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곳 수도암에는 모든 초목들은 서식하고 있으나, 칡은 절 주위 300m 이내에는 일절 없어졌다고 한다.    

수도암 약광전 석불의 전설(2)

수도암에 대적광전을 덮을 만큼 거대한 괴목이 법당의 기와를 상하게 해서 비가 새어 스님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어느날 노승 한 분만 절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여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있어 선 실에서 정진하다 밖을 내다보았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시 참선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는 크게 영차영차 하는 소리가 나서, 노승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에 쿵하는 소리가 났다.        

법당 쪽을 돌아 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법당 뒤의 거목이 뿌리째 뽑 혀서 법당 탑있는 곳에 거꾸로 쳐박혀 있는게 아닌가. 노승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것이 있어서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에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한님들의 어깨와 손에 잎새와 나무껍질이 묻어 있었던 것 이다. 그 거목은 법당 쪽으로 무게가 실려 법당을 헐지 않고는 베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대중 스님들은 그 나무를 베어다가 화목으로 사용하 고 밑둥치는 남아 있었는데 1969년 선원(禪院)을 지어면서 치웠다고 한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 동ㆍ서 삼층석탑(金泉 靑巖寺 修道庵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297호.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 1438, 청암사 (수도리))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다.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이다.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곳곳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출처 : 문화재청)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서 삼층석탑(金泉 靑巖寺 修道庵 西 三層石塔)






김천 청암사 수도암 동 삼층석탑(金泉 靑巖寺 修道庵 東 三層石塔)






석등


창주도선국사비(刱道詵國師碑)


수도암 나한전(修道庵羅漢殿)

「수도암 나한」전설 1

옛날 한 사도가 공양미를 메고 거창읍에서 이곳까지 산을 넘어오는데 한 동자가 나타나 “수도암에 있는 사람인데 스님께서 저에게 짐을 받아 오라 해서 왔습니다.”라고 하고는 쌀가마니를 받아 어깨에 둘러메고 나는 듯이 산을 넘어 갔다. 뒤를 따라 절에 도착해 보니 쌀가마니는 마루에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 소리로 부르자 그제야 스님이 선실에서 나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스님이 연유를 되묻자 노인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스님이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나한전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나한의 어깨에 지푸라기가 묻어 있었다. 이렇듯 수도암에서는 나한의 신통력에 의한 기적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수도암 나한」전설 2

수도암에는 대적광전을 덮을 만큼 거대한 괴목이 법당의 기와를 상하게 해서 비가 샜는데, 이것이 스님들의 걱정거리였다. 어느 날 노승 한 분만 절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여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노승이 선실에서 정진하다 밖을 내다보았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시 참선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는 크게 “영차영차!” 하는 소리가 나서 노승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에 쿵하는 소리가 났다.

법당 쪽을 돌아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법당 뒤의 거목이 뿌리째 뽑혀서 법당 탑 있는 곳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노승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에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한들의 어깨와 손에 잎과 나무껍질이 묻어 있었다. 그 거목은 법당 쪽으로 무게가 실려 법당을 헐지 않고는 베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대중 스님들은 그 나무를 베어다가 화목으로 사용하고 밑둥치는 남아 있었는데, 1969년에 선원(禪院)을 지으면서 치웠다고 한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천 청암사 수도암(金泉 靑巖寺 修道庵) 연화봉(蓮花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