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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 문성왕릉.헌안왕릉.진지왕릉.진흥왕릉

노촌魯村 2018. 10. 11. 10:20




경주 문성왕릉(慶州 文聖王陵. 사적 제518호. 경북 경주시 서악4길 80-100 (서악동))

일제시대 고적으로 관리하여 오던 것을 1963년 사적으로 일괄 지정하였으며, 2011년 진지왕릉과 분리하여 재지정하였음. 

문성왕은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였으나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봉분에는 호석이나 상석 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남측에 1기의 표석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로 문화재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봉분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경주 헌안왕릉(慶州 憲安王陵. 사적 제179호.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

신라 47대 헌안왕(재위 857∼861)의 무덤이다.
헌안왕은 본명이 김의정으로,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다. 재위기간 동안 특별한 치적은 없으나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는데 힘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61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공작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무덤의 형태는 가장 단순한 형식의 무덤으로 높이 4.3m, 지름 15.3m의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 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진지왕릉(慶州 眞智王陵. 사적 제517호.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4길 80-100 (서악동))

일제시대 고적으로 관리하여 오던 것을 1963년 사적으로 일괄 지정하였으며, 2011년 문성왕릉과 분리하여 재지정하였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이며, 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이다.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진흥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지왕릉은 호석으로 추정되는 괴석의 일부가 봉분에 노출되어 있으며, 봉토 및 주변에는 잔디를 식재하여 토사유실을 방지하고 있다.

봉분 정면에 표석 1기와 문화재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 남동쪽으로 길이 32m의 석축이 만들어져 있다.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진흥왕릉(慶州 眞興王陵. 사적 제177호.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의 무덤이다.
진흥왕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점령지에 척경비를 세웠다.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를 세웠다. 또한 삼국통일의 중추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높이 5.8m, 지름 20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된 이 무덤은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신라 왕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무덤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며, 기록상 법흥왕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하므로 서악동 무덤들 중 위에서 두 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