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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노촌魯村 2020. 2. 11. 17:34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제37호 )

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황복사지석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아진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3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일정 시 사진

 땅속에 묻힌 12지상

 

 

 




 귀부

발굴조사 후 모습



귀부


발굴조사 후 모습





 황복사지 동편의 무덤의 석재

경주 낭산에서 통일신라 시대 가릉(假陵) 발견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 중인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에서 신라 왕릉에 사용되는 다량의 석재와 건물지, 담장, 도로 등을 확인하였으며 명문기와 등 300여 점의 중요 유물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유적은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이 발견된 전(傳) 황복사지(黃福寺址)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약 135m 떨어진 지점의 논 경작지로서, 이 일대는 오래 전부터 홍수로 인해 파괴된 신라왕릉과 관련 석재유물(면석, 탱석 등)들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던 곳이다.

학계에서는 신문왕릉이나 성덕왕비의 소덕왕후릉, 민애왕릉 등과 비슷한 급의 폐왕릉지로 추정되거나, 『삼국유사』 기록에 나온 의상대사(義湘大師)의 탑돌이와 관련있는 절인 황복사의 목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지이다. 경주시는 이러한 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훼손을 방지하고 폐왕릉지에 대한 앞으로의 복원·정비를 위해 이번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경주 낭산 동쪽일원 내 추정 고분지에서 확인된 석재 유물은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미완성 석재 등으로 신라 왕릉에서 주로 사용되는 유적이며 그 주변으로 8~9세기가 중심연대인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너비 16~17m) 등이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 신라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과 ‘정원사(鄭元寺, 鄭은 추정명문)’명 명문기와 등 유물 300여 점이 출토되었다.
  * 탱석(撑石): 면석과 봉토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돌
  * 면석(面石): 기단면이나 석축면을 형성하는 비교적 편평하고 넓은 돌
  * 갑석(甲石): 대석(臺石) 위에 올리는 돌
  * 지대석(地臺石): 지면을 단단하게 다진 후 놓는 돌

발견된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추정해본 왕릉의 지름은 약 22m로, 전(傳) 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규모이다. 조사 결과,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으로 출토된 점, 후대에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된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할 때, 당시 왕을 위하여 사전에 왕릉을 준비하던 도중 어떠한 사유인지 축조공사를 중단하였던 가릉(假陵) 석물로 추정된다.

가릉 주인공은 발굴조사 결과와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孝成王, ?~742薨)으로 추정된다.
  * 가릉(假陵): 왕의 죽음이 임박하여 사전에 능침을 만들어 두는 무덤 

가릉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일반적으로 신라왕경에서 확인되는 주택이나 불교 사원 건축과는 차이가 있어서 관청이나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불교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았고,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이라고 적힌 명문기와 등의 유구로 봐서 신라 왕경의 행정 조직체중 하나로 알려진 습비부(習比部)와 관련된 관청이었을 가능성도 추정해볼 수 있다.

도로유구는 현재까지 신라왕경 내 조사된 다른 도로보다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졌는데, 왕경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의 너비가 약 16~17m 정도인 점으로 볼 때, 왕경의 방리(坊里)구획에 의해 연결된 도로이거나 황복사지 사역(절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이나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대형의 미완성 석재를 이동하기 위한 특수 목적으로 가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는 앞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왕릉 축조과정과 능원제도를 비롯한 신라왕경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 능원(陵園):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세자나 왕세자빈 같은 왕족의 무덤인 원(園)을 통틀어 이르는 말(출처 : 문화재청 2017. 2. 9)

경주 낭산에서 통일신라 시대 가릉(假陵) 발굴현장 전경









연화보상화문수막새, 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 신라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과 ‘정원사(鄭元寺, 鄭은 추정명문)’명 명문기와 등 유물 300여 점이 출토되었다.

 황복사지 내에 있는 우물

 

 당간지주(절단이 되어 아래 부분이 남아 있음)



 

  

 

國寶 79호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國寶 80호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

연화대좌(蓮華臺座)에 푸른 녹이 있을 뿐

광배와 온몸에는 금빛이 찬란하다.

제작은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년(70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