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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충의당 忠義堂.용산서원龍山書院 답사 가다.

노촌魯村 2020. 2. 16. 16:30

충의당(忠義堂.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9.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328-17 (이조리))

대경상록자원봉사단(총단장 하종선) 영상반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충의당과 용산서원을 답사하였다.

최진립 장군은 1568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25세 나이로 의병으로 참전했고, 정유재란 때 결사대 100명과 함께 큰 공을 세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훈련부정, 도총부도사, 공조참판, 경기공청(충청)황해 수군통어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이후 병자호란 당시엔 공주 영장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 후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군과 싸우다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했다. 전사 1년 후 시신이 수습될 당시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25세의 나이로 임진왜란 의병으로 참전하여, 69세의 나이에 병자호란 참전과 순절한 특별한 이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순절 후 정무공, 병조판서, 청백리에 추증되었다.

전투 시 자신을 따라온 종 옥동, 기별에게 집으로 가라 일렀으나, 그들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라며 기어이 남아서 싸우고, 그들도 결국 함께 전사한다. 지금까지도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은 옥동과 기별의 제사를 함께 모신다. 당대엔 노비의 제사를 지낸다고 양반들에게 욕을 먹었으나 그럼에도 꿋꿋이 모시고 종들을 기리는 비각까지 세웠다.

최진립 장군의 손자 최국선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마음가짐으로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 살렸고, 이는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용산서원(龍山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88.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2)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숙종 25(1699)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37(1711)숭렬사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1870)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구조는 전학후묘로 앞면에는 공부하는 공간인 민고당, 뒷면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숭렬사가 있다. 서원 오른쪽에는 관리사가 있고, 서원 입구에는 신도비각이 서 있다.

서원 입구에 있는 최진립 장군 신도비는 1740(영조 16)에 세웠으며 신도비각은 1742(영조 18)에 건립했다.

신도비는 비신의 높이 218센티미터, 너비 114센티미터, 두께 39.5센티미터에 이를 만큼 규모가 크다. 거북의 머리 길이는 70센티미터이다.

- 신도비 귀부

이 귀부는 통일신라시대의 특징들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 이 귀부가 조선시대가 아닌 늦어도 8세기 이전의 통일신라시대 귀부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신라고고학자에 의하면 이 귀부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태종무열왕릉비 귀부를 비롯한 통일신라시대 귀부와 상통하여 조선시대 귀부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고 하면서, 통일신라시대 귀부를 그대로 가져와 재사용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귀부의 구체적인 제작 시기를 7세기 후반의 경주 사천왕사 터의 귀부와 거의 같은 시기이거나, 아니면 8세기 중반의 성덕왕릉 귀부보다 이른 시기로 추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