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얼굴무늬 수막새(慶州 人面文 圓瓦當. 보물 제2010호.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는 ‘신라의 미소’라고 널리 소개된 신라시대 원와당(圓瓦當)으로, 일제시기 경주 사정리(沙正里, 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수막새는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하여 당시부터 고고학술 자료를 통해 존재가 알려졌으며, 이후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나 1972년 10월 국내에 반환되었다.
일반적인 와당 조성방법처럼 틀(瓦范)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와범으로 먼저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써서 마무리한 작품이다.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한 흔적도 있다. 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 선이 조화를 이루며 신라인들의 염원과 이상향을 구현한 듯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손으로 빚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신라인의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낸 작품으로서, 당시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慶州 人面文 圓瓦當)」는 일제시기 경주 영묘사 터(靈廟寺址, 현재 사적 제15호 흥륜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수막새(원와당, 圓瓦當)이다. 1934년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라는 일본인 의사가 경주의 한 골동상점에서 구입한 뒤 일본으로 반출했으나, 고(故) 박일훈 (전)국립경주박물관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1972년 10월 국내로 돌아온 환수문화재이다.
* 수막새: 목조건축의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된 둥근 형태로 만든 와당으로 ‘원와당(圓瓦當)’으로 불림. 반면 수막새 아래 좌우로 장방형으로 부착된 드림새를 암막새(평와당)라고 함
와당 제작틀(와범)을 이용해 일률적으로 찍은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 달리 손으로 직접 빚은 작품으로, 바탕흙을 채워 가면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 후 도구를 써서 세부 표현을 마무리한 것이다. 비록 왼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 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스런 모습 등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
* 와범(瓦范): 기와를 만들 때 쓰이는 거푸집. 점토를 넣어 모양을 만들 때 사용함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삼국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신라인들의 염원과 인간적인 모습을 구현한 듯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신라의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신라의 미소', 되찾은 지 46년 만에 보물 된다.
1930년대 초 경주 야마구치(山口) 의원에서 공중의로 일하고 있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1908~1993)가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경북 경주 사정동 영묘사 터(현재 사적 제15호 흥륜사지)에서 독특한 와당인 수막새 한 점이 발견됐고, 일본인 골동품상인 구리하라(栗原)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목조건축에서 지붕의 기왓골 끝에 얹는 수막새의 무늬는 대개가 연꽃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수막새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당시 26살의 청년의사 다나카는 구리하라 가게로 달려가 주저 없이 100원을 주고 구입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과 학술지인 <신라의 고와연구>에 이 수막새가 소개됐다. ‘여자의 웃는 얼굴을 조각한 회백색 기와이며, 신라 와당 중에서도 아직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섬세한 문양이 특히 이색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제작 시기는 7세기쯤으로 판단됐다. 사람들은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두고 ‘신라의 미소’라 했다.
그러나 1944년 다나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신라의 미소’도 함께 가져갔다. 그렇게 이 기와는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이 수막새의 존재를 잊지 않았던 이가 있었다. 바로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이던 박일훈(재임 1963~73)이었다. 박 관장은 1934년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이 와당을 소개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와 편지를 6~7차례 주고받았다. “와당의 소재를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원로 고고학자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11~2011)과도 연락했다. 그 결과 기와를 소장한 다나카가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에서 야하타니시쿠(八幡西區)병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얼굴무늬 수막새도 간직하고 있었다.
와당의 행방을 찾아낸 박 관장은 곧 다나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기와는 ‘신라의 미소’라 일컬을 만큼 한반도에 있어야 제 가치를 인정받는다.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증해 달라”는 것이었다. 간곡한 편지에 다나카의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8년이 지난 1972년 10월 다나카가 직접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와 얼굴무늬 수막새를 기증했다.
문화재청은 2018년 10월 2일에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고 2018년 11월 27일 바로 이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경주 영묘사터 출토 ‘얼굴무늬 수막새’를 보물 제2010호로 지정하였다.
수막새는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된 둥근 형태의 와당이다. 틀로 찍지 않고 손으로 빚은 이 수막새는 왼쪽 하단 일부가 사라졌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미가 돋보인다. 이 수막새가 발견된 장소는 경주 사정리(사정동)였다. 이곳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왔다. 이 수막새도 한동안 흥륜사 출토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이 절터는 흥륜사가 아니라 영묘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묘지사(靈廟之寺)’, 혹은 ‘대영묘사(大令妙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영묘사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인 635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묘사는 유명한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즉 ‘선덕여왕의 세 가지 신비로운 예측’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즉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모여 우는 것을 본 선덕여왕이 “여근곡에 가면 백제적병이 있을 터이니 가서 죽이라”고 명했다는 것이 ‘지기삼사’ 중 두 번째 예측이다. 영묘사에는 또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다가 탑을 돌며 불로 변해 죽은 지귀(志鬼)의 일화도 전한다.
선덕여왕의 전설이 담긴 이 절의 어느 건물에 얼굴무늬 수막새가 올려져 있었는지도 궁금할 따름이다.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삼국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서 “신라의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기와가 단독으로 보물로 지정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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