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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능지탑과 중생사 마애불 및 관세음보살상

노촌魯村 2006. 2. 12. 21:38

 

 

 이 十二支出土地(십이지출토지)는 石方形(석방형)으로 되었으며 다시보면 龍半(용반)같기도 하다. 높이는 약 15尺(척)이고 花崗岩(화강암)으로 構成(구성)되었고, 花崗岩(화강암) 切石(절석)에 蓮辨(연변)을 조각한 加工板石(가공판석)이 남아있다.
西紀(서기) 1937年에 十二支中(십이지중) 干像石(간상석)이 이 築臺(축대)에서 出土(출토)되었다. 이 出土地(출토지)는 寺址(사지)로는 보기 어렵고 火葬(화장)터로 使用(사용)되었던 特異(특이)한 遺蹟(유적)으로 推定(추정)되며 新羅(신라) 30代(대) 文武王(문무왕)의 火葬(화장)터가 아닌가 推測(추측)된다.
1979年에 復元(복원)되었다. 文獻 : 文化遺蹟總覽 (慶北編 : p.78) 문헌 : 문화유적총람 (경북편 : p.78)
* 연혁(유래)
이 탑지는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m이다. 능지탑(陵旨塔), 능시탑(陵示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고도 부른다.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원형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고 나머지 돌은 옆에 모아 두었다.
이 탑지는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시신 화장터로 추정되며, 발굴할 때 굴방에서 큼직한 소조불상(塑造佛像) 파편이 나왔으므로 탑묘였을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1979년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된다.(경주시청자료에서)


능지탑 옛 사진


 

 本尊(본존)은 地藏菩薩(지장보살)로 推定(추정)되며 左右脇侍(좌우과시)는 神將像(신장상)으로 되어 있는 三尊形式(삼존형식)이다. 이 特異(특이)한 三尊像(삼존상)의 本尊(본존)은 新羅時代(신라시대)에선 보기 어려운 形式(형식)으로 寶髮(보발)은 양 어깨에 드리웠고 몸 전체는 띠줄이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다. 手印(수인)은 省略(생략)되었고 몸의 姿勢(자세)가 뚜렷치 않다. 半跏(반가)의 姿勢(자세)를 취하고 있는 兩(양) 脇侍神將像(협시신장상)은 各各(각각) 武器(무기)를 들고 本尊(본존)을 向(향)하고 있는데 服裝(복장)은 統一期(통일기)에 盛行(성행)한 四天王像(사천왕상)과 同一(동일)하다.
* 연혁(유래)
이 마애삼존불은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 예는 매우 드문 일이다.
중앙에 있는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비슷하다.
두건을 쓴 승려 복장으로 몸과 머리에서 빛을 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손 모양은 생략되었다.
왼쪽 신장상은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오른쪽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 악귀를 몰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화장터로 전해지는 능지탑(陵只塔)이 이곳과 가까이 있다.(경주시청자료에서)

 

 화공과 중생사

옛날 중국 천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여인은 천하 절색의 미녀였다.

『아마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고금에는 물론 그림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니라.』

이처럼 흡족해 한 천자는 어느 날 미모의 여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 화공을 불렀다.

『화공은 듣거라. 오늘부터 이 여인의 실제 모습을 한치도 틀림없이 그려 그녀의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볼 수 있도록 해라.』

왕명을 받은 화공의 이름은 전하여지지 않으나 혹자는 장승요라고도 한다.

그 화공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인의 모습을 다 그렸는데 그만 마지막 붓을 놓는 순간 붓을 잘못 떨어뜨려 그림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게 되었다. 아무리 지원 보려 했으나 고쳐지질 않았다. 화공은 어느 결에 그 미인의 배꼽 밑에는 반드시 날 때부터 붉은 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게 돼 완성된 그림을 천자에게 바쳤다.

『아니 이럴 수가. 옷 속에 감춰진 배꼽 밑의 점까지 그리다니….』

그림을 본 황제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의 형상은 실물과 똑같이 매우 잘 그렸으나 감추어진 배꼽 밑의 점은 어떻게 알고 그렸느냐?』

화공이 답이 없자 황제는 진노하여 명을 내렸다.

『화공을 당장 하옥하여 중벌을 내리도록 하라.』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재상이 아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습니다. 원컨대 용서하여 주옵소서.』

『만약 그가 어질고 곧다면 어젯밤 짐이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과 같으면 용서해 줄 것이니라.』

천자의 명을 받은 화공은 어느새 11면관음보살상을 그려 바쳤다. 황제는 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연 간밤 꿈에 본 보살상과 똑같지 않은가. 황제는 그제서야 화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인정하고 용서해 줬다.

죄를 면한 화공은 박사 분절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로는 신라국에서는 불법을 높이 받들어 믿는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그곳에 가서 함께 공부하여 널리 이웃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소?』

박사 분절이 좋다고 승낙하자 두 사람은 신라국에 이르러 중생사관음보살상을 조성했다.

그 관음상이 봉안되자 신라인들은 우러러 기도하여 많은 영험을 얻었다.

신라 말년 천성년간(926∼929)에 정보 최은함이 나이가 많도록 아들이 없다가 이 절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서 기도를 올린 후 아들을 낳았다. 그 후 석 달이 채 못되어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침범하여 성안이 어지러웠다. 최씨는 아기를 안고 절로 달려가서 관음보살님께 이렇게 고했다.

『이웃나라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 일이 다급하게 됐습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인해 식구 모두 화를 입을 우려가 있사오니 참으로 대성께서 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면 원컨대 자비의 힘으로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가 다시 상봉케 하여 주옵소서.』

최씨는 슬피 울면서 세 번 절하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 밑에 감추고는 뒤를 돌아보며 떠났다.

아기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과 달랐으니 그가 곧 정광벼슬에 이른 승노였다. 그는 낭중 최 숙을 낳았고, 숙은 안제를 낳았으니 이로부터 계속 자손이 끊이지 않았다.

통화 10년(992) 3월에 있었던 일이다. 중생사에 사는 성태 스님은 보살 앞에 꿇어앉아 고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절에 살면서 부지런히 예불을 모시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허나 절의 토지에선 나는 것이 없어 더이상 향사(香祀)를 계속할 수 없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려 인사드립니다.』

보살님께 하직 예불을 올리던 스님은 그만 잠시 졸았다. 그때 관음보살님이 꿈에 나타나 스님에게 일렀다.

『법사는 아직 이곳을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제사에 쓸 비용을 충분히 마련해 줄 것이니라.』

잠에서 깬 스님은 기뻐하며 다시 머물기로 작정했다.

그날로부터 13일 후 갑자기 낯선 사람 둘이서 소와 말에 물건을 잔뜩 싣고 절 문 앞에 이르렀다.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우리는 김천 지방(지금의 김해) 사람입니다. 며칠 전 중생사에 사신다는 스님 한 분이 우리를 찾아와서 공양에 쓸 비용이 어려워 시주를 구하러 왔다고 하시기에 마을에서 시주를 모아 쌀 엿 섬과 소금 넉섬을 갖고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절에서 시주 나간 스님이 없으니 그대들이 필경 절을 잘못 찾아온 것 같소.』

『아닙니다. 스님. 그 스님이 우리를 데려 오다가 저기 우물가에 이르러 절이 멀지 않으니 먼저 가서 기다리겠노라며 앞서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따라온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으나 성태 스님은 그들을 데리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며 반가운 듯 크게 말했다.

『스님! 바로 이 부처님이 시주를 구하러 오셨던 그 스님상입니다.』

그들은 말하면서도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후 중생사에는 공양 올려지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불이 났다.

또 어느 날 저녁에는 일주문에 불이났다.

『중생사에 불이 났어요. 빨리들 나오세요.』

마을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달려와 불을 끈 후 법당에 올라가 보니 관세음보살상이 없어졌다.

『에그머니나, 부처님이 안 계시잖아요?』

『아니 부처님이 어디로 가셨을까?』

『불난 와중에 영험이 있으시다니 누가 훔쳐간 것 아닐까요?』

『이렇게 모여서 걱정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 모두 나가서 경내를 찾아봅시다.』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경내 이곳 저곳을 찾았다. 그때 한 여인이 외쳤다.

『여기 관세음보살님이 계세요!』

여인은 절 뜰 가운데 우뚝 서 계시는 관음상을 보고 반가움과 놀라움에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불이 나니까 누가 밖으로 안전하게 모셨나 보군요. 누가 부처님을 이곳으로 모셔 오셨습니까?』

모두 모른다고 고개를 저을 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관음대성의 신령스러운 힘인 것을 알았다.

그 후 중생사를 찾는 신도들의 기도는 오늘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간곡히 기도할 때 기도 성취가 이뤄지고 있어 옛전설을 되살린다고 한다.(자료출처: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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