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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태종무열왕릉과 김인문묘

노촌魯村 2006. 2. 12. 22:07




 

 

 

 

태종무열왕릉

구분: 능/묘 - 사적 제 20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 문무왕

위치: 경주시 서악동 842

교통: 고속터미널 옆 사천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건천행 4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 1.7km정도 가면 선도산 아래 태종무열왕릉에 이른다.시내에서 건천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20분 간격으로 다닌다.넓은 주차장은 있으나 그 밖의 시설은 없다. 선도산 아래 나지막한 송림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능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은 북서쪽에 위치한 해발 380미터인 선도산(仙桃山)에서 뻗어나온 각 지릉들로 감싸여 있으며, 앞에는 서천과 서악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배산임수지형을 하고 있다. 경주에 있는 많은 능 가운데 누구의 왕릉인지 단정할 만한 확증이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이 왕릉은 앞쪽에 태종무열왕릉비가 서 있어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인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무열왕은 신라 제25대인 진지왕 손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이자 27대 선덕여왕의 동생이었다. 조부가 실정으로 4년만에 왕위에서 추방된 후, 직계손들은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대 명장 김유신의 도움으로 진골 중에는 처음으로 보위에 등극하여 신라 제29대 왕이 되었고 재위동안에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원효와 인연을 맺은 이야기,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하게 된 이야기 등 무열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와 전설이 전한다. 김유신의 누이와 무열왕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30대 문무왕이다. 능은 원형 토분으로 둘레 100m, 높이 12m 이며, 봉분의 아래에는 자연석으로 축대처럼 쌓고 큰 돌을 드문드문 괴어 놓은 호석을 둘렀는데 지금은 괴어 놓은 큰 돌만 보인다. 이와 같은 호석 구조는 경주 시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고분의 호석 구조보다 한단계 발전한 형식이다. 능앞 비각에는 국보 25호로 지정된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가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난 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비신은 없어지고,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이수만 남아있다. 목을 길게 내밀고 등이 육각형의 귀갑으로 덮인 거북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웅건하게 조각된 귀부와 좌우 모두 여섯 용이 몸을 틀고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동감 넘치는 이수는 통일신라 초기 석조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 25호>

선도산 아래에 위치한 신라 제 29대 태종무열왕릉은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둘레 110미터에 높이가 11미터에 이르고, 봉분(封墳) 밑변에 큰 돌을 심어 호석(護石)으로 삼은 형태의 능이다. 태종무열왕(654-661)은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고, 이름은 춘추(春秋)인데 조부인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만에 실정으로 왕위에서 밀려나면서 그 직계 후손(後孫)들은 왕위계승권 밖으로 잠시 밀려나는 듯했으나, 춘추공은 대망(大望)을 품은 김유신(金庾信)과 손을 잡으면서 왕좌(王座)에 올랐다. 김춘추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고구려, 일본, 당 등을 사행하면서 신라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는 외교에 심혈을 기울였고, 나당동맹을 성립시켜 통일을 위한 기틀을 다졌으며, 왕위에 오른 후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병합을 꾀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능 앞 비각 안에는 비신이 없고, 아래 받침의 구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는 이수만 남아 있는 능비(陵碑)가 있다. 이 능비는 태종무열왕릉비로 현재 남아 있는 이수와 귀부의 뛰어난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잇는데, 이수는 여섯 마리 용이 서로 얽혀 있고 가운데 부분의 평면에 태종의 둘째 아들인 신라의 명필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알려진 두줄 여덟글자 "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내리써져 있으며, 조각의 용모습은 모두 뒷다리를 들어 여의주(如意珠)를 받들고 있고, 귀부는 머리를 치켜들고, 네발을 힘껏 내디디면서 앞으로 갈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거북모습이다. 이 비석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무열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비신은 없어지고 지금은 대석이었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만 남아 있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통일 초기의 씩씩한 기상을 볼 수 있어,여의주를 받들어 올린 여섯 용을 새긴 이수와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칭찬이 높다. 그리고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왕지비"의 여덟 글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글씨라 전한다. 귀부의 길이 333cm,가로 86cm,높이 54cm,이수높이 110cm이다.











 

 

 

 

 

 

 

 

 

 

 

 

 

김인문묘

 



김인문 묘<기념물 제 32호>

태종무열왕릉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큰 고분중 큰것이 김인문의 묘이고 다른 하나는 김양의 묘로 알려져 있다.문인석이나 무인석,석수도 없는 간소한 묘이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진덕여왕 5년(651)에 당나라에 일곱 차례나 왕래하며 삼국통일 전후 당나라와의 외교에 큰 공로를 세운 뛰어나 외교관이었다. 묘 주위에는 별다른 석물은 없고 다만 북편에 정, 측면 1칸반의 사모지붕을 한 비각이 있다. 비각의 내부에는 비신과 이수가 없는 귀부가 머리를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자세로 있다. 이 귀부는 1934년 8월 27일 보물 70호로 지정, 보호중이다. 묘는 저경 장축이 23m인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는 4m내외이며 봉분 저부에는 직경 30cm 내외의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김양은 무열왕의 9대손으로 통일 신라와 당나라의 화평 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인문은 글씨도 잘 써 태종무열왕릉 비문을 썼다.  

 

 

 

 

 

신라.천년을이어온고도경주(경주의고분을찾아서)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6.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