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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팔공산

신숭겸장군 유적지(2)

노촌魯村 2006. 3. 10. 13:03

 

동대구역->아양교->불로동->파군재(동화사.파군사 가는 길의 삼거리) 삼거리의 신숭겸장군상

 

 

 

 

 

        

  

 

 

 

 

 

 

파계사 방면으로 401번 버스가 지나다가, 파군재 삼거리에서 파계사쪽으로 120여m쯤 가면 조그만 지묘교 다리가 보인다.

다리건너 우측 동화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우뚝 솟은 홍살문이 이곳이 유적지임을 알려준다. 파군재 삼거리를 지나 동화사 쪽 방향 첫 번째 지나면 우뚝 솟은 왕산 아래 고가(古家)가 산자락 아래 옹기종기 널려있다.

제일 윗채가 표충사(表忠祠)로 위패와 함께 신숭겸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호피가죽 위에 큰칼을 짚고 떡 버티어 서있는 몸집이 장대한 장군의 영정을 보면 그 당시 위풍과 기상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홍살문 뒤로 있는 신숭겸장군 순절단은 태조10년(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공산동수(公山桐數:지금의 동화사)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으나, 의외로 싸움은 대패하여 왕건이 위험에 처하자 왕건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왕을 피신시킨 후 싸우다 전사한 자리이다.

후일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양주(지금의 춘천)에 예장하고 이곳에 피묻은 흙, 의복 등을 수습하여 그가 전사한 자리에 혈단으로 쌓은 것이 순절단인데, 일명 표충단 이라고도 한다.

그 후 1819년 신의직에 의해 묵은 제단을 중수하고 고려장절 신공순 절지지"(高麗壯節 申公殉 節之地)라 새겨진 순절비를 건립하였다.

단소(壇所)내에는 여름이면 400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백일홍 고목이 단(壇)주위를 에워싸 만발한 꽃은 역사의 덧없음과 함께 아늑하고 포근함마저 느끼게 한다.

한편 영정을 모신 표충사 옆 충렬비각에는 용머리에 거북받침으로 건립한 장절공 행적비인 충렬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오랜 풍상 속에서도 찡그리지 않고 해학적으로 웃고 있는 거북의 모습은 매우 이채롭게 느껴진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유적은 지난 74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 장절공의 충절을 기리는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으며, 순절단(殉節壇)과 충렬비(忠烈碑)등이 있다. 현재는 초·중등학교의 학습과 방학 때면 문화 유적 순례지로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가 오동나무 숲으로 덮혀 있으며, 이곳이 공산전투의 최대 격전지였다 한다. 이곳 주변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나 재미나는 전설이 많이 전혀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면,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그의 군사들이 크게 패했다는 파군(破軍)재, 지묘동 뒷산에 피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해 "왕건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王山),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 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있어 불로동(不老洞), 겨우 위험을 피해 이곳에서 한숨을 돌리고 찌푸린 얼굴을 활짝 폈다는 해안(解顔), 도주 중 날은 반야이고, 중천에 달이 떠 있어 탈출로를 비췄다고 해서 반야월(半夜月), 이 지역에 도달하여 안심했다는 안심(安心) 등의 유래가 있다.

그 외 왕건이 숨어 정세를 살폈다는 은적암(隱迹菴), 편안히 쉬어간 곳이라 하여 안일사(安逸寺), 또한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는 무태(無怠) 등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대구광역시 동구청 자료에서)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혈묘

 

 

 

 

 

 

 

 

 

 

 

 

 

 

 

 

 

 

 

 

 

 

 

 

 

 

 

 

신숭겸장군 묘소(춘천)

 사당

 

 신장절공묘역(申壯節公墓域 시도기념물제21호 (춘천시))

이곳은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장군(將軍)의 묘역이다. 장절공은 918년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추대해서 고려 건국(建國)의 대업(大業)을 이루었다.태조(太祖) 10년(927) 대구(大丘)(현재의 대구(大邱))에서 신라(新羅)를 도와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군(甄萱軍)과 싸우다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공은 태조를 수풀 속에 숨기고 임금 수레를 타고 나가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하여 태조의 위급을 모면케 하였다.태조는 공의 죽음을 슬퍼하여 시신(屍身)을 거두어 이곳에 예장(禮葬)하였다. 그리고 전사한 곳에는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공의 명복을 빌게 하고, 공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로 원윤(元尹)을 삼았다. 또한 태조는 팔관회(八關會) 때 공과 김낙(金樂) 등의 전사한 공신들을 생각하고 가상(假像)을 만들어 열석(列席)시키고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이것은 그후 전승되었는데, 예종(睿宗)이 팔관회에서 이를 보고 두 장수의 후손을 불러 시를 지어 내리고 충절(忠節)을 기리는 『도이장가(悼二將歌)』란 노래를 지었다.조선(朝鮮) 순조(純祖) 5년(1805)에 세운 신장절공 신도비(神道碑)는 당시의 세도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 짓고,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로 이름난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썼다.(문화재청)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전사 시에 머리가 없어 태조 왕건에 의하여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장례를 하였다고 한다. 도굴을 염려하여 무덤을 세 군데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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