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임금이 어느 날 대궐 속으로 승려가 들어오는 꿈을 꾸였다. 그 꿈이 너무 선명하여 신하에게 남대문 밖을 살펴보게 하니, 정말 한 승려가 쉬고 있었다. 그 승려가 바로 파계사의 영원선사였다. 기이하게 여긴 숙종은 영원선사에게 왕자 탄생을 위한 백일 기도를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숙빈 최씨에게 태기가 보였고, 이듬 해 왕자가 탄생했으니 바로 훗날의 영조대왕이다. 크게 기뻐한 숙종은 영원선사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린다. 현응은 지혜로운 승려였다. 당시 파계사는 유생들의 횡포로 승려들이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현응은 왕실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도록 숙종에게 청해 유생들의 횡포를 막아냈다고 한다. 지금도 파계사에는 현응대사의 비석과 부도, 영조대왕의 도포, 하마비가 있다.(파계사 안내문에서)
파계사 원통전 앞에 있는 누각으로 1715년(숙종 41)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파계'가 원래 아홉 갈래나 되는 절 좌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지기가 흘러나가는 것을 방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진동루 또한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 곳의 기를 제압 할 수 없어 기를 제압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었디고 한다. 진동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으로 가공하지 않는 방형의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아래층 어칸을 통로로 하고, 2층에는 통간 우물마루를 했다. 건물 규모에 비해 부재가 다고 약한 감이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조선 시대 중.후기 양식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이다.(파계사 안내문에서)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불전을 말한다.(파계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원통전이 중심 법당이다.) 파계사는 원통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설선당과 적묵당 그리고 앞에는 진동루 등이 위치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 계관법사가 중건하고, 1695년 현응조사 때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렸다.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후 둥근기둥을 올리고 있다. 법당 내부의 불단은 은해사 백흥암의 수미단과 같은 형태로 정교하게 무늬를 새겨넣어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불단의 상부에는 보개를 설치하고 있다.(파계사 안내문에서)
하마비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것으로 영조대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통전 용마루의 청기와(용마루 한 가운데 청기와가 한 장 있음)
목조관음보살좌상으로 원통전의 주존불로서 불단 위에 정좌하고 있다. 가슴과 배, 양 어깨와 두 팔을 거쳐 양쪽의 무릎까지 흘러내리는 영락장식도 화려하지만 머리 위의 보관은 더 볼 만하다. 전면에 가득한 꽃무늬, 당초무늬가 매우 정교하여 곳곳에 수십 개의 보석이 박혀 문자 그대로 '보관'이다. 1979년 이 관음보살상을 개금하다가 영조의 도포가 발견되어 원당사찰 파게사의 위상을 다시 한번 입증한 바가 있다. 보물 제992호이다.(파계사 안내문에서)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인 기영각은 영조대왕을 위해 기도한다는 뜻으로 이름한 전각이다. 1696년(숙종35) 현응조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1974년과 1983년의 두 번에 걸쳐 보수공사가 있었다. 건물은 화강석 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건립 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파계사 안내문에서)
파계사 부도
산령각
설선당
적묵당
성전암
영조대왕의 11세 때 쓴 글씨라고 전하는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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