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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덕

신돌석장군의 충의사와 기념관

노촌魯村 2007. 5. 23. 22:44

 조선 말기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의병장들은 많지만 신돌석 장군

(1878~1908)처럼 약관의 나이에 평민으로서 의병대장이 되어 활약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신돌석 장군은 을사보호조약 다음해인 1906년에 의병을 일으켜 영해, 영덕, 평해에서 부터 삼척, 양양, 강릉, 원주, 안동, 영양 등 경북 북동부와 강원도 일대까지 신출귀몰하며 왜군에 저항했던 의병장이다.

  

 충의사 삼문

 충의사의 동재

 충의사 서재

 충의사

 충의사 현판

 충의사의 신돌석장군 영정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순경(蕣卿)이고, 호(號)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이다. 이명(異名)은 돌석(乭石), 태홍(泰洪), 태을(泰乙), 대호(大浩)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8년(고종 5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당시는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출생하여 퇴계(退係)의 방계인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暎陵義兵陳)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창군하니 각처에서 모여든 동지가 300명이 넘었다 한다.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 1907년 이인영(李麟榮) 13도창의총대장으로부터 경상남북도를 합친 교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 공략전에 참여했으나 평민이란 이유로 배제되었다. 1908년에 이르러 의병장들이 많이 순국하고 전세가 불리해져 의병활동이 위축되자 11월에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신돌석은 후일을 기약하고 지품면 눌곡리 외가의 동생들인 김상렬, 상태, 상호 형제를 찾아가 은거했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이 준 독주를 마시고 도끼로 살해되고 말았다. 그 때의 장군의 나이 31세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1971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1999년 장군의 혼이 어린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충의사

 의병대장신공유허비

 

 순국의사 신돌석장군 기념비

 순국의사 신돌석장군 기념비

 

 신돌석장군 기념관

  신돌석장군 기념관 내부의 신돌석장군상

 신돌석장군 묘소(서울 국립묘지 애국자 묘역)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

 울진 우편 취급소  습격

 기념관의 전시물

 기념관의 전시물(용수와 족쇠)

신돌석 장군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평해의 월송정에 올라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자작시를 낭송하곤 곧 바로 의병을 일으키고 만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길을 잃고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 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 구나"

기념관의 관리사

신돌석설화 바로가기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eol-hwa/sin-dol-seo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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