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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성주

세종대왕자태실과 선석사

노촌魯村 2007. 5. 24. 19:43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국가시정 사적444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산천의 기운이 모인 풍수의 명당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한 땅" -세종실록

"길지를 가려서 태를 잘 묻어

미리 목숨과 복을 기르게 하소서" -세종실록

신석사 맞은 편 세종대왕자태실 자리는 세종실록에 언급한 그 모습을 그대로 찍어낸 듯 오묘합니다

     성주 세종대왕자태실(국가시정 사적444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이 태실은 조선 세종대왕의 아들의 태실 18기와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만든 태실 석물 1기가 안장된 곳이다. 태실의 높이는 140c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항아리와 태 주인공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처음에는 20여기의 태실을 두었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과 무고로 연좌된 회의군, 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실과 태실비 등은 세조 3년(1457)에 산 아래로 파 던져졌으나 1977년 흩여진 석물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세조가 왕위에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고 비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 볼 수 없으며, 민담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거의 글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태항아리, 지석 등의 유물의 일부는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및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1929년 왕가로 옮겨 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태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세종대왕자태실 안내문)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웠다고 하는 비

 세조가 왕위에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고 비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 볼 수 없으며, 민담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거의 글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세조)의 태실과 태실비

 안평대군의 태실과 태실비(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실과 태실비 등은 세조 3년(1457)에 산 아래로 파 던져졌으나 1977년 흩여진 석물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금성대군의 태실(세조 3년(1457)에 산 아래로 파 던져졌으나 1977년 흩여진 석물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만든 태실과 태실비 

태봉에 얽힌 이야기

선석산 아래 태봉에서 자라한 이 태실은 조선조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와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원래 이 산봉우리에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와 묘각이 있었으나, 조선 왕가에서 왕자들의 태를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해서 지관을 통해 길지를 찾던 중, 이곳의 산세와 지형이 뛰어난 명당이라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했다. 이것이 세종 20~24년(1438~1442)에 왕자들의 태를 안장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태실지이며, 1975년 복원 당시 출토된 분청인화문 대접 등 7점이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이장경의 묘를 옮긴 것은 그의 장지에 노승이 나타나 “산(태봉) 위의 저 나무를 베고 12개의 관을 묻어 묘를 쓰면 더 없는 길지이나 묘각을 지으면 후일 그 소유가 바뀌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마침 산 위의 나무를 베니, 나무에서 큰 벌이 나와 노승은 쏘여죽고 후손들이 11개의 헛관으로 묘를 쓰고, 그 후 묘각을 지었기 때문이라 한다.(경상북도:전설과 함께하는 경북관광) 

 

선석사

신라 말 629년에 의상대사가 화엄 10찰 중 하나로 선석산 서쪽에  창건하여 신광사라 했으며 고려 말 나옹 스님이 신광사를 옮기려고  현 위치를 발견하고 기초 공사를 하던 중 나무를 자르고 풀을 베고 보니 집채보다 큰 바위가 있어 동리 사람 수백 명을 동원 갖은 수단을 다 했으나 바위를 옮길 수 없었다.
대사는 선정에든 사흘 만에 그 바위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후 선석사로 고쳤다 한다. 현재 가람은 1804년(순조 4) 중건되었으며,  현재 전각으로는 대웅전,명부전,칠성각,산신각,범종각,천왕문,정법료,요사 등으로 아담하게 배치되어있다.

건너 200m 거리인 안산 봉우리엔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있어 예로부터 선석사는 태실 수호 도량으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한다

 선석사 대웅전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의 탄생불

 대웅전 내부

 

 명부전

 명부전 내부

 칠성각

 칠성각 내부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

 산신각의 산신탱화

 산신각 위쪽의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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