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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성주

성주 법수사지 (星州 法水寺址)

노촌魯村 2007. 1. 26. 23:15

 

금당사(金塘寺)라 불렸던 법수사(法水寺)터(지趾)이다. 애장왕 3년(서기 802년)에 세워진 금당사의 이름이 법수사로 바뀐 것은 고려 중엽인데, 한때 구금당(九金堂), 팔종각(八鍾閣) 등 1,000칸이 넘는 건물과 도은암(道恩庵), 보현암(普賢庵), 백운암(白雲庵) 등 100여개의 암자를 거느렸다고 한다. 지금은 이 절터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 여기저기에 석탑, 돌기둥, 주춧돌, 암자터 등만 흩어져 남기고 있을 뿐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막내아들 범공(梵空)이 나라가 망하자 중이 되어 여생을 보낸다고 전한다.   

   

      

수륜면 백운리에 소재한 법수사지 3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 애장왕(802年)때 대사찰인 법수사가 건립될 당시에 세워진 탑으로서 2개의 기단(基壇)과 3층 탑신(塔身)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6m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신라식 일반석탑이다.

하대중석(下臺中石)에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고, 우석(隅石)이 있는데 하대갑석(下臺甲石)은 4장으로 되었으며, 중석 받침 몰딩이 있다. 갑석부연(甲石副椽)이 조각된 상대갑석(上臺甲石)이 있으며 탑신부 옥신(屋身)은 우주가 양각(陽刻)되어 있고, 옥개(屋蓋) 받침은 각층 5단으로 되어 있으며, 전각(轉角)은 반전(反轉)되었다. 낙수면(落水面)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3층 옥개석(屋蓋石) 한쪽 모퉁이와 상륜부(相輪部) 노반(露盤)은 깨어져 있다.(성주군청 자료에서)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星州 法水寺址 三層石塔.보물 제1656호.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1)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한 법수사지(法水寺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지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 잡고 있다. 사역은 남북 150m, 동서 150m 정도이고 크게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금당지로 추정되는 축대 아래에는 백운동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당간지주가 고목의 뿌리에 일부 쌓여 있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상?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양식으로 노반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석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의 9세기 후반기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자료)

 

  

 석탑 앞의 석등 하대석 

 기단부 안상문 

        

      

             

 불상대좌의 일부 

 

 

 

 법수사지의 축대

법수사지당간지주 (法水寺址幢竿支柱.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

통일신라 후기 애장왕(802년)때 건립한 신라의 대사찰인 법수사지 입구에 세워진 것으로 사찰 창건때 같이 세워진 것인가는 의문이다

높이 3.7m이며, 장방형의 석주 2개가 상대하여 서있고 지주 밑에는 간을 받치기 위한 지대석이 원추형이 되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단아한 지주로 당간지주 계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당간지주 앞의 연화문

법수사지 고려 현판(월간 해인 2007년 2월호에서)

 

해인사 성보박물관(관장 본해)은 지난 1월 2일 윤용진 교수(경북대학교 명예교수)로부터 법수사지 고려현판을 수증했다. 법수사지 고려현판은 윤용진 교수가 1962년 가을 법수사지를 답사하던 중 금당지 앞 축대 아래쪽 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목조현판으로 현판은 앞뒤면을 대패로 밀어서 두께가 0.7cm밖에 되지 않는 송판이었으며, 세로 29.3cm, 가로 14cm 정도만이 남아 있어 완전한 상태에서의 길이와 기문의 전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현판의 기문내용 중 주목 할 만한 점이 있어소개하고자한다.
서체는 고려시대의 금석문에 잘 쓰였던 구양순체로서 숙달된 필력으로 해서했다. 현판에 남아 있는기문은 끝부분의 5행에 59자가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원문의내용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有天····之瑞
諸王公三重命餘作記而不獲牢讓
略記此事之本末示於將來者也時大
宋建炎二年己酉十二月三日伽倻山新
興寺住持重大師慧觀記

내용은‘諸王公의 3차에 걸친 명에 사양할 수 없어서 차사지본말此事之本末을 약기略記하여 장래자將來者에 알린다’라는 내용이며, 가야산 신흥사 주지 대중사 혜관이 고려 인종 7년(1129)에 적었음을 부기해 두었다. 위 내용에서 주목할 부분은
“대송건염이년 기유십이월삼일 가야산 신흥사 주지 중대사 혜관 기

大宋建炎二年己酉十二月三日伽倻山新興寺住持重大師慧觀記”

로이중건염建炎이라는 연호는 송宋나라 고종이 제위에 오른1127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고려에서는 인종 5년에서 8년까지 사용되었다. 하지만 연대와 간지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는 다른 금석문의 예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며 당시 송왕조의 혼란했던 정세로 인해 고려와의 국교가 정상적이지 못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가야산 신흥사 주지 대중사 혜관이라는 작기명이다. 기문을 작기한 혜관에 대해서는고려사를 위시한 사서에는 전연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다만 본 현판의 기문에 의해 인종 7년에 가야산 신흥사의 주지로서 대중사라는 높은 승계僧階를 받은 고승이고 고려목판본 대각국사문집을 조조雕造한 혜관과 동명이란 데에 서 주목되는 인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영통사 대각국사비와 묘향산 보현사비에도 혜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대각국사의 문도로서 대각국사 문집 조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문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가야산 신흥사에 대한 관련 기록은 현재 전해지는 바가 없으며 단지 가야산 일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찰 중 한 곳이라는것밖에 알 수 없으므로 안타까울따름이다. (월간 해인 2007년 2월호)

 

법수사지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법수사지 삼층석탑

법수사지 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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