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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 충렬사

노촌魯村 2008. 5. 25. 21:59

忘戰必危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남해 충렬사

 

 

 충렬사 정문

남해충렬사(南海忠烈祠 사적  제233호 )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忠烈)이란 액호(額號)를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온 이 사당이 창건된 것은 인조 때 일이었다. 이충무공이 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한 직후 그의 유구(遺軀)가 한 때 이곳에 안치되었는데, 1632년(인조 10) 이곳 유림들이 그 옛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그 최초의 사당이다. 그 후 공이 순국한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던 해인 1658년 (효종(孝宗)9) 통제사 정익(鄭익)이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지으니 이것이 충렬사의 중건(重建)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63년(현종(顯宗) 4) 이 사당은 통영 충렬사와 함께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 현재 사당 곁에 있는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이며, 1661년(현종 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그 비문을 쓴 이비는 1663년에 통제사 박경지(朴敬祉)등이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참고로 해 둘 것은 옛날 이 충렬사 곁에 호충암(護忠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가까운 화방사(花芳寺)의 승도 10명과 승장(僧將)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충렬사지(忠烈祠誌)」에 의하면, 이것을 수직(守直)하던 승장 유습(裕習)이란 사람의 꿈에 이충무공이 현몽한 내용의 일화가 실려 있다. 유습이 밤에 잠이 들었는데 공(公)이 나타나 그를 꾸짖기를“ 너는 왜 산을 순시하지 않느냐”고 하여 깜짝 놀라 일어나서 여러 승려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산속을 돌아보니 사당 뒤에다 어떤 사람이 암장(暗葬)을 해 둔 것을 발견, 이튿날 이를 관가에 보고하여 조치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일화는 허튼 이야기가 아닌, 충무공의 영험(靈驗)이 그만큼 생생하게 이곳에 현현(顯現)하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충무공이 순국한 후 이곳에서는 자운 (紫雲)이란 승려가 매년 쌀 수백석을 가지고 노량바다에 와서 공을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올렸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운은 임진왜란 초부터 충무공 휘하에 들어가 해상 의승장(海上 義僧將)으로 활약했던 승려로서 평소에 공을 흠모한 것이 순국한 뒤에는 그의 충의를 깊이 사모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 충렬사는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된 후 현재 경내에서는 사당 외에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의 시설들이 보수 정화되어 있다. 그리고 사당 후원에는 충무공의 순국 직후 유구(遺軀)가 가장(假葬)되었던 자리에 가분묘(假憤墓)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것을 경남도청에서 세운「충렬사비(忠烈祠碑)」가 현지에 있다. (문화재청 자료)

 

 충렬사 외삼문

 

 사당

 사당 내부

 사당 내부의 그림

 

 충무공의 비

 충무공 가묘

 충민공비

 

현재 사당 곁에 있는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 1661년(현종 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그 비문을 쓴 이비는 1663년에 통제사 박경지(朴敬祉)등이 세운 것이다.

 

 충렬사 중건비

  충렬사 중건비의 뒷면

 거북선

 

 거북선 내부의 장군의 선실

 

 

 

 거북선의 노

 

충무공 이순신의 자취를 따라서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10.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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