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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경주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

노촌魯村 2009. 2. 12. 22:22

월지(임해전지.안압지) 항공사진(경주시청 자료.사진클릭하시면 원본크기의 사진이 ...)

경주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

(경주 월지(임해전지(慶州 臨海殿址). 안압지))

사 적 18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임해전은 문무왕때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기념사업의 하나로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문무왕 14년(674) 2월에 궁내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금수를 길렀다. 문무왕 19년(677) 궁궐을 중수하였는데 지극히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임해전을 둘러싸고 있는 안압지는 본래의 이름이 월지(月池)로서, 우리나라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 못은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반드시 한 모통이는 숨겨져 못 전체를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다를 상징하는 정원이기 때문이다. 임해전의 명칭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바다와 산을 주제로 한 이 정원은 고도로 세련된 신라 조원술(造園術)을 보여준다.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발굴조사하였는데 이 때에 금은장식품, 생활용구, 나무배, 기와 등 엄청나게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절정에 달한 궁중의 풍류생활을 짐작하게 해 준다.

한편 이 임해전은 응렴랑(膺廉郞)이 화랑정신의 실천 덕목인 3미(三美)를 처음 이야기한 곳이다. 헌안왕 4년(860), 왕은 국선 응렴랑을 불러 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응렴랑은 국선이 되어 전국을 순유하고 돌아온 터였다. 헌안왕이 묻기를 "낭이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다녔의니 무슨 특이한 일을 보았는가?"라고 하였다. 낭이 대답하기를 "신이 미행(美行)있는 자 셋을 보았습니다. 남의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겸손하여 남의 아래에 있는 것이 그 하나요, 남보다 부자이면서 입는데 검소한 이가 있으니 그 둘째요, 본래 강한 세력이 있으나 그 위엄을 쓰지 않은 이가 있으니 그 셋째입니다." 응렴이 체득한 겸손, 검소, 겸양의 세가지 덕목을 삼미(三美) 혹은 삼덕(三德)이라 한다. 그는 지방을 순유하면서 권세있는 호족들을 접하고, 명산대천을 찾아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높은 이상을 수련했다. 그리하여 명예와 재산과 권세 등 현실의 범용한 욕구를 초탈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헌안왕은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고 그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를 사위로 삼게되었다고 한다. 국선 응렴랑은 후일 48대 경문왕이 되었다.

(1) 울지(안압지)의 규모와 발굴조사

발굴 결과 알려진 연못의 규모는 동서 200미터, 남북 180미터로서 호안의 석축의 길이는 총 1킬로미터 정도이다. 석축은 건물이 자리잡은 서편과 남편은 직선으로, 북편과 동편은 40여개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데 직육면체로 다듬은 돌로 쌓았다. 못의 동편과 북편에는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명승지인 무산(巫山)의 12봉우리를 본 따 산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마도 기록에 나오는 새와 짐승을 이곳에 길렀을 것이다. 물은 동남편에서 석조로 된 입수구(入水口)를 통해 들어와 못 안에 있는 대.중.소 3개의 섬을 돌아 동북편으로 나 있는 출수구로 흘러 나가는데 출수구에서는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안압지는 교묘하게 평면을 구성하여 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 보아도 못 전체가 한 눈에 들어 올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임해전이라는 전각 이름이 말해주듯 연못의 좁은 공간에서도 넓은 바다를 느낄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의 축조에는 당나라의 장안성내 대명궁의 궁원 배치도 본떴겠지만 백제의 조경 기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짐작된다. 이런 점에서도 통일 후 외부문화를 적극 수용한 신라인의 문화의식를 였볼 수 있다.

발굴 결과 많은 건물터, 회랑터 및 담장터가 드러났는데, 주변의 건물지는 당시 동궁의 규모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현재 이 중에서 건물 3동이 복원되고 나머지의 초석이 정비되어 공개되고 있다.

(2) 발굴된 유물

월지(안압지)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3만여점이나 된다. 왕과 신하들이 잔치할 때 빠진 것들과 몇 차례의 화재시 들어 간 것들, 그리고 신라의 멸망으로 폐허가 된 후 남은 것들이 허물어져 쓸러 들어간 것들이다. 서쪽 호안 건물터 가까운 쪽에서는 주로 기와 등 건축 부재 및 불상 등이, 섬을 중심으로 한 동쪽 호안에서는 토기류. 목선 등이 나왔는데, 지금까지 경주지역 고분에서 나온 유물들과는 달리 실생활용품들로서 당시의 궁중생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또 통일신라의 문화뿐만 아니라 당나라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살피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가) 기와

유물을 재질별로 보면 기와와 전(塼)류가 2만4천여점으로 가장 많고, 다음 토기류 3천3백여점, 금속공예품 1천1백여점, 목제품이 9백여점, 그리고 철제품 6백여점 등이다.

와전류는 거의 대부분 삼국통일 직후 부터 신라 멸망시 까지 제작.사용되었던 것들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와전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용도별로 보면 지붕위에 얹는 암키와.수키와, 처마긑을 장식하는 와당(瓦當)이 달린 수막새.암막새, 추녀의 내림마루 끝이나 모서리를 장식하는 귀면화 등 기와류가 17종, 건물 바닥 및 인도에 깔거나 벽 또는 불단(佛壇)을 장식했던 전(塼)류가 3종이다.

신라에서 언제부터 기와가 제작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4 내지 5세기경에는 궁성에 수키와.암키와가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되며, 불교가 공인되고 흥륜사. 황룡사 등 큰 절이 지어지는 6세기 중엽 경에는 연꽃 무늬 수막새도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기와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월지(안압지) 출토의 수막새는, 전대(前代)의 수막새가 테두리에 아무런 무늬가 없고 안의 무늬도 단순한 한겹의 연꽃무늬인데 반해, 모두 원형 테두리에 작은 물방울 같은 무늬(連珠文)를 쭉 돌린 안에 여러가지 무늬를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연꽃무늬는 이제 두겹잎이 되거나 잎사이사이에 다시 한잎을 겹쳐 놓은 무늬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다 보상화문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그 외에 서조문, 사자문, 사람머리에 새의 몸과 날개를 가진 가릉빈가문, 기린문 등이 그 때 사용되었던 장식의 주제들이다.

암막새는 통일 직후 부터 처음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초무늬가 주류를 이루면서 보상화. 인동. 포도. 국화 무늬들이 결합되기도 하고 비천. 봉황. 용. 금수 등 사악한 귀신이나 재앙을 물리치고 길상을 비는 뜻의 무늬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암막새의 등에 “의봉(儀鳳)4년”명이 새겨진 것들이 나와 동궁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기와임을 알 수 있었다.

귀면화는 벽사의 의미을 갖고 있는데 모두 완숙한 솜씨에 의장이 화려하다. 무섭게 보이려고 뿔과 송곳니 등을 강조하였으나 일본의 귀면와에 비하여 오히려 해학적인 표정을 갖고 있다. 이 중에 녹색. 황갈색의 유약이 칠해진 것들이 있어 당시 동궁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엿볼 수 있다.

치미는 화재 예방이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지붕의 용마루 양끝을 장식하는 것인데, 새꼬리 모양이라 해서 그렇게 부른다. 복원된 3점의 치미는 754 755년에 그려진 그림의 불전(佛殿)에 나타나는 치미와 형태가 같아 대략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전은 무늬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있고, 형태도 장방형, 삼각형, 방형의 세가지가 있다. 윗면의 주된 무늬는 보상화문이며 연꽃무늬와 초화문도 있다. 또 옆면에는 두 마리 사슴이 당초 덩쿨 사이로 뛰어가는 쌍록보상화문이 새겨지기도 한다. 500여점의 보상화문중 한 점의 측면에 “조로(調露)2년 (680)”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동궁창건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금 확인해 주었다.

(나) 토기

토기류는 고분 등에서 나오는 의기용의 토기와 달리 실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사발. 뚜껑. 접시 등이 대부분이며 등잔, 시루. 병. 풍로 등도 나왔다.

사발 중에는 먹으로 글씨를 쓰고 구름. 꽃 무늬를 그린 것이 있는데 글자중에 “다(茶)”자가 있어 당시에 차그릇으로 쓰인 듯하다. 이외에도 글씨를 쓰거나 새긴 것, 도장으로 찍은 그릇들이 나왔다.

등잔도 157점이나 출토되었는데 안쪽이 검게 그을고 기름 찌꺼기가 붙어 있는 겄도 있었다. 풍로는 화구(火口)와 연통을 갖추고 위에 다른 그릇을 얹어 끓일 수 있도록 크고 작은 구멍이 2개 뚫려 있다.

건물에 단청을 할 때 물감을 담아 쓰던 단청용 그릇도 나왔다. 그릇 안팎에 붉은 석간주(石間硃)가 묻어 있는 것이 많고 주황색을 내는 데 쓰는 물감인 장단(長丹)칠이 묻어 있는 소잡이 달린 항아리도 있다.

당시 실제 사용했던 문방구로 벼루가 많이 나왔는데 돌벼루. 녹유토기벼루. 칠기벼루. 토기벼루 등이 있다. 둥근 평면에 여러 개의 받침 다리가 있는 것과 둥근 평면에 벼루 몸체를 원통형 대(臺)로 받친 것 두 종류로 크게 구분된다. 먹이 묻어 있거나 벼루 면이 닳은 것도 있다.

(다) 금속공예

금속공예들도 실생활에 직결되는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금동제의 접시.대접.숟갈 등이 있다. 또 장식용으로 금동제의 용머리. 귀면문고리. 봉황장식. 연꽃봉오라장식. 발거리장식. 옷거리장식 등이 있고 거울. 동곳. 비녀. 반지 등도 나왔다.

금동가위는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쓰이는 것으로,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쪽 바깥에 테두리를 둥글게 세웠다. 손잡이는 용의 몸체와 꼬리를 본뜬 형태로 비늘무늬를 당초문과 함께 새겨 놓았다.

청동숟가락은 통일신라시대의 것 이외에 고려, 조선시대 것도 나왔다. 통일신라 것은 숟가락 면이 원형 또는 타원형이다.

금동장식품중 용머리 한쌍이 나왔는데 의자 손잡이 장식으로 부착되었던 듯하다. 봉황장식은 발밑에 받침대가 있어 역시 어떤 물체에 부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연꽃봉우리 장식 24점은 목제의 난간의 위쪽에 꽂았던 것이고, 귀면문고리도 장식겸 실제 문고리로 사용된 것이다.

(라) 불상

신앙에 관계된 유물로 불상이 많이 나왔다. 불단을 장식했던 판불(板佛)과 광배에 입체적으로 장식된 화불(化佛)이 대부분이다. 금동제의 판불중 형태가 완전한 아미타삼존불은 화려한 대좌 위에 삼존이 완벽한 구성으로 배치되었으며 고도의 주조 기술로 양감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통일신라 전반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금동판 보살좌상도 있는데 장식성이 강하면서도 고요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금동여래입상은 흔히 보는 옷모양과 머리를 하고 있으나 받침장식이 다소간 화려한 것이 특징이며 크기도 큰편이다. 기타 수많은 화불. 비천상. 신장(神將)상. 보주장식들이 있다.

(마) 목제품

나무제품은 대부분 쉽게 삭아 없어지는데 안압지의 경우에는 물속에 잠겨져 이었으므로 비교적 잘 남아있어 궁중생활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건축부재인 난간이나 서까래. 서까래 받침 등의 파편이 많이 나왔으며, 배와 노. 인물상. 남근. 목간(木簡) 등의 귀한 유물도 나왔다. 배는 완형 1척과 2척분의 파편이 나왔다. 완형은 세 개의 나무를 통으로 파서 배 모양을 만든 후 비녀장 모양의 막대기를 안쪽 바닥에 앞뒤 하나씩 가로질러 조립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실물로는 제일 오래된 배이다.

남근은 고대사회 이래로 남근숭배사상 및 민간신앙을 담은 주술물이며, 인물상은 오늘날에도 마을 입구에 서서 수호신 역활을 하는 장승 형태이다.

목간은 나무편을 얇게 깍아 문서, 편지, 기타의 글을 기록한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먹으로 예서나 행서체로 쓰거나 새긴 것인데, 중국 연호인 천보(天寶), 관등명인 한사(韓舍)등이 있어 대부분이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바) 철제품

철제품은 고분 출토품과 달리 실생활 용구들이 다량으로 나왔다. 당시 동궁에 속해 있으면서 월지(안압지)의 조경과 관리를 담당했던 관청인 월지악전(月池嶽典)과 관련되는 물건으로 여겨진다. 주요 유물로 작살. 가래. 보습. 쇠스랑. 호미. 낫 등 어구와 농구, 망치. 도끼. 가위 등의 목공구 외에 철검. 대도. 창. 투구 등 무구와 등자. 행엽. 재갈 및 멈추개 등 마구도 있다. 대부분 무덤에서는 나오지 않는 자료들인데 특히 투구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상의 다종다양한 유물 이외에 칠공예품도 약간 출토되었다. 궁궐생활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자료들로서 찬합. 사발. 잔. 바리류 등과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박달나무로 만든 벼루, 칠기꽃장식 등이 있다.

월지(임해전지) 모형
월지에 물이 들어오는 곳의 시설물
월지의 물이 나가는 곳의 시설물

 경주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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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시의 월지(임해전지.안압지)
일정시의 월지(임해전지.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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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주시(시장 최양식)는 녹조가 심화돼 경관 저해와 수질 악화가 가중되고 있는 동궁과 월지 내의 연못에 대해 오는2012년 11월 5일부터 2012년 11월 25일까지 전면 세척하기 위하여 월지의 물을 제거하므로서  드러 난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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