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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간묘(諫墓)

노촌魯村 2009. 2. 12. 22:28

12) 간묘(諫墓)

 

 

경주시 황성동 계림중학교 뒷편에 간묘(諫墓)라 부르는 고분이 있다. 지금은 과수원과 아파트 등 사유지로 길이 막혀 뒷편의 좁은 오솔길을 찾아야만 겨우 들어가 볼 수 있어서,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이 간묘는 진평왕 때의 충신 김후직(金后稷)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사냥을 매우 즐겨서 무리를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 사냥에 열중하다보니 나랏일은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뜻있는 신하들은 우려하였으나 감히 왕에게 직언하지 못하였다. 병부령(兵部令)이었던 김후직은 이러한 왕의 생활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왕의 앞에 나아가 성의를 다해서 간했다. “나라의 정무에 등한하시고 사냥에만 마음을 쏟는다면 선조에 보답하는 도리가 아니오니 자제하십시오.” 그러나 사냥에만 탐닉하였던 진평왕은 그의 말에 전혀 귀를 귀울이지 않았다. 왕에게 충심으로 간언하던 김후직은 상심하여 그만 병에 들어 죽게 되었다. 그는 임종에 이르러 “나는 임금님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죽게 되어 안타깝구나, 내가 죽으면 임금님이 사냥 다니시는 길가에 묻어라.”라고 유언하였다. 김후직이 죽자 그의 아들들은 진평왕이 즐겨 사냥가던 유림(遊林)숲으로 가는 길 옆에 산소를 모셨다. 어느 날 왕은 여늬 때와 같이 유림 숲으로 사냥을 나ㅓ섰는데, 도중에 바람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임금님 사냥을 거두십시오.” 왕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그 소리는 김후직의 무덤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왕은 눈을 감고 말이 없었으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한참 후 왕은 수행하던 무리에게 말머리를 궁궐로 향하도록 명하였고, 다시는 즐기던 사냥을 하지 않고 나라의 일에만 마음을 쏟게 되었다. 죽어도 나라를 잊지 못하여 왕에게 간하였다는 이 설화는 진평왕 때의 튼튼한 정치기강과 충(忠), 신(信)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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