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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노촌魯村 2009. 2. 12. 22:30

 

서악리고분군 항공사진(경주시청 자료. 사진클릭하시면 원본크기의 사진이 ...) 

14)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태종무열왕릉은 사적 제20호로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仙挑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능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둘레가 110m이다. 봉분 밑 둘레에는 드문드문 자연석을 돌려두고 있다. 이것은 봉토(封土)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은 후 돌 축대가 힘을 받을 수 있도록 큰 돌로서 괴어 놓은 돌레돌(호석:護石)형식이다.

무열왕릉의 앞쪽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화강암으로 조각한 국보 제25호인 태종무열왕릉비는 지금은 비신(碑身)은 없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만이 남아 있는데 귀부는 길이가 약 3.3m, 폭은 2.54m로 장방형(長方形)의 기석(基石) 위에 얹혀져 있고 금방이라도 살아서 동해바다를 향해 기어 가려고 하는 듯한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이수는 높이가 약 1.1m로 여섯 마리의 용(龍)이 서로 등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수의 중앙에 전서(篆書)로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 두 줄로 양각(陽刻)되어 있어 분묘의 주인공이 무열왕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글씨는 김인문이 썼다고 한다.

태종무열왕은 신라 제29대 왕으로 이름은 김춘추(金春秋)로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골(眞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은 즉위 전에 선덕, 진덕의 두 여왕을 보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와의 싸움에서 사위 김품석(金品釋)이 죽자 이를 계기로 통일을 향한 노력을 본격화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호응을 얻어 백제를 치고자 고구려에 가서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당과 일본에 가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당과의 군사적 동맹을 실현한 것은 그의 공적인 것으로 이로서 삼국통일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 원년(654년)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세히 살피게 하여 내정을 다졌다. 무열왕 7년(660년)에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략하였다. 왕자 법민(法敏), 김유신장군 등과 함께 정병 5만을 이끌고 남천정까지 행차하여 신라군을 독려함으로서 마침내 백제를 평정하였다. 661년(무열왕 8년) 5월에는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정벌의 대군을 발하였으나 왕은 대업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미남이고 능변(能辯)이라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라 하였으며, 당에 가서도 명성이 높아 그의 인품과 수완으로 외교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뛰어난 경륜과 김유신장군의 위세가 어울려 신라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여 120여년간의 황금기를 누리게 된 것도 이에 연유하는 것이다. 

 

 

 

 

 

 귀부의 뒷발

 귀부의 앞발

 

 

 

 

 

 일정시의 사진

金春秋 통일외교, 판을 제대로 읽었다.

신라 삼국통일 민족의 원형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