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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천관사(天官寺)터

노촌魯村 2009. 2. 12. 22:26

10) 천관사(天官寺)터

 

 

재매정 집에서 월성 쪽으로 올라와 남천의 월정교(月精僑)를 건너서 경주시 교동 145번지 들가에 이르면 김유신이 청년 시설 사랑한 여인 천관녀의 집이 있던 곳에 세운 천관사터가 지금도 있다.

천관사터는 경주시 교동, 오릉(五陵) 동쪽 논 가운데에 있는데 2,700여 평이 사적 제3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논둑에는 무너진 석탑재(石塔材)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다. 4각의 탑재에다 8각의 구조물을 받쳤던 턱이 조각되어 있다. 아직 절터를 발굴하지 않아서 가람 배치가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천관사는 김유신이 사랑하던 천관녀를 위해서 세운 원찰(願刹)이라는 점 때문에 인간적인 정감이 흐르는 곳이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영웅이다. 그의 극적인 일생 중에 어렇듯 인간적인 사랑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 나라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전기를 살펴보면 너무 성인 군자같이만 기록되어 있어서 오히려 삭막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많다. 이런 점에서 천관사터는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유적으로 중요하다.

김유신이 청년이었을 때 천관이란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에 김유신의 어머니는 “장차 너는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공명을 세우고 왕에게 충성하여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랐는데 천한 여인과 더불어 놀아나다니 이게 웬말이냐”하고 울며 꾸짖었다. 김유신은 천관녀의 집에 드나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런던 어느날 김유신이 술에 취해서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만 말이 늘 가던 천관녀의 집으로 가고 말았다. 천관녀는 한편으로 반기고 한편으로 원망하여 울면서 나와 김유신을 맞이하였다. 김유신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머니와 약속을 어긴 꼴이 되어 차고 있던 칼로 말의 목을 베고 말안장을 버린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 천관녀는 매정한 임을 그리는 일로 일생을 보내면서 사랑의 원사(怨詞)를 지어 노래로 불렀다,.

우리는 위의 기록에서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萬呼太后)가 낳은 딸 만명(萬明)부인이다. 김유신의 가계는 가야 수로왕의 12대손으로 신라의 왕족과 혼인 관계로 진골의 품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유신이 골품에 들지 않는 육두품이나 오두품의 여인과 결혼을 하면 신라의 골품사회에서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舒玄)은 진평왕의 누님의 남편이다.

김유신은 후에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인 지소(智炤)부인과 결혼하였는데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낳은 딸이다. 문희는 김춘추와 연애를 하여 아이를 배고 정식 결혼이 잘 안 되자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는 연극을 꾸며 선덕여왕이 김춘추(태종무열왕)에게 결혼을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김유신은 태종무열왕보다 9살이 더 위인데 무열왕의 셋째딸과 결혼한 것이다. 그러니 김유신은 문무왕에게는 여동생의 남편이 되는 동시에 어머니인 문명왕후의 오빠이므로 외삼촌이 된다.

신라는 골품제의 사회로 이와 같은 근친혼 관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의 열전에 보면 아찬 벼슬을 한 군승(軍勝)이란 김유신의 서자가 있다. 군승은 그 어머니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였다. 어쩌면 군승의 어머니가 천관녀인지도 모른다. 김유신이 무열왕의 셋째 딸과 결혼한 것은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인데 그 앞에 천관녀와의 연인 관계는 지속되었던 것이며 천관녀는 원사를 지을 만큼 지식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하였어도 김유신은 천관녀를 위해서 집자리에 원찰을 지어 줄 만큼 대단히 사랑이 깊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천관녀가 죽고 난 후 때때로 천관사에 들어 그 녀의 극락왕생을 빌며 그리움에 잠겼을 것이다.

천관사 창건의 연유가 이와같이 애절한 연정의 역사가 되어 고려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이공승(李公升:1099-1183)이 여기에서 천관사란 시를 남겼다.

천관사 옛 사연을 들으니 처연하다

정 많은 공자가 꽃 아래 놀았더니

원망을 품은 가인(佳人)이 말 앞에 울었네

말은 유정하여 옛길을 알았는데

하인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을 더했던고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여

“섬토(蟾免)가 함께 산다는 말”

만고에 전한다.

조선 성종 때 대제학 좌찬성을 역임하고 시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기재라는 찬탄을 받으며 ‘동인시화’ ‘동문선’ 등을 남긴 서거정(1420-1488)이 김유신의 묘 앞을 지나면서 ‘과유신묘(過庾信墓)’란 시문을 남겼다. 이 시구 속에 김유신과 함께 그 이름이 전하는 천관녀의 사연을 남겼다.

천관사 오래이니 지금 어드멘고

만고에 아름다운 여인 그 이름이(김유신) 따라 전하네

天官寺古知何處 萬古蛾眉姓字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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