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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백률사(栢栗寺)

노촌魯村 2009. 2. 12. 22:29

백률사는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 기슭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절과 관련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국선 부례랑(夫禮郞)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692년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은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았는데, 그 문객(門客)이 천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도 안상(安常)과 더욱 친했다. 693년 3월 부례랑이 무리를 거느리고 강원도 금란(金蘭 : 지금의 통천)에 놀러나가 북명(北暝)의 지경(地境)에 이르렀다가 말각적(靺鞨賊)에게 붙잡혀 가게되었다. 이에 문객들은 당황하여 되돌아왔고 안상만이 그의 뒤를 쫓아갔다.

효소왕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말하기를, “선왕께서 만파식적을 얻어 나에게 전하여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천존고(天尊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국선(國仙)이 갑자기 말갈적에게 붙잡혀 갔는지 그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도다.”

그 때 마침 이상한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으므로 효소왕이 더욱 두려워하여 그것을 조사하도록 했더니 창고 안에 보관해 두었던 만파식적과 현금이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에 효소왕은 “내가 복이 없어 국선을 잃고 도 두 가지 보물까지 잃게 되었구나.”하고 탄식하면서 창고를 지키던 5명을 가두고 널리 알리기를, “두 보물을 찾는 사람은 1년의 조세로 상금을 주겠노라.”고 하였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의 관음보살상 앞에 가서 여러 날 저녁 기도를 드렸드니, 난데없이 향을 피우는 탁자 위에 만파식적과 현금(玄琴)이 나타났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관음보살상 뒤쪽에 와 있었다. 부례랑의 양친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 동안의 내력을 물어 보았다.

“저는 말갈적에게 잡혀 간 뒤부터 대도구라(大都仇羅) 집의 말먹이꾼이 되어 들판에서 방목(放牧)하는 일을 맡아 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용의단정한 스님 한 분이 나타나서 만파식적과 현금을 손에 들고 저를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가?’라고 하기에 저도 모르게 스님 앞에 끓어앉아 ‘임금님과 부모님을 그리워 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했더니 그 스님께서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하면서 저를 데리고 해변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안상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만파식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각각 한 짝씩 타게하고 스님은 현금을 탔는데, 둥실둥실 떠 가더니 잠깐 동안에 이 곳까지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급히 효소왕께 알렸더니 크게 놀라면서 그들을 환영하였고, 부례랑은 만파식적과 현금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효소왕은 너무나 감격하여 금은으로 된 그릇과 가사(袈裟), 전답 등을 백률사에 공양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했다. 그리고 창고를 지켰던 관리를 포함한 국내의 모든 죄인들을 석방하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에 나타나니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기를 “이것은 만파식적과 현금에 대해 봉작(封爵)을 내리지 않은 표징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효소왕은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萬萬派派息笛)이라 높혀 불렸더니 비로소 혜성이 사라졌다.

만파식적과 부례랑에 얽힌 이 설화는 삼국통일후 안정과 평화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에 걸맞은 화랑의 상(像)을 상징한 것이다. 이제는 화랑들도 부례랑처럼 학문과 예술을 존중하고 산천을 유오(遊娛)하며 풍류생활을 즐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통일신라의 융성했던 문화는 이러한 풍토에서 발전한 것이다. 

 대웅전 

  마애탑 

 

 삼성각

 백율사 약사여래상(경주박물관 소장)

 백율사 석등 일부

 

 이차돈 순교비(경주박물관 소장) 

일정시의 이차돈 순교비(백률사 부근에서 넘어져 있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