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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흥무왕(興武王)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金庾信) 묘(墓)(사적 제12호)

노촌魯村 2009. 2. 12. 22:30

15) 흥무왕(興武王)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金庾信) 묘(墓)(사적 제12호)

 

 

경주의 고속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있는 서천교(西川橋)를 넘으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냥 바로 가는 길은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쪽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右側)으로 서천을 따라 훌륭하게 손질된 길이 흥무로(興武路)라고 하여 흥무왕(興武王)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金庾信)묘(墓)로 가는 길로써 송화산(松華山)의 중턱까지 잘 다듬어져 있다. 흥무로는 물론 능묘의 주변 일대는 성지(聖地)답게 잘 정화(淨化)되고 미화되어 민족을 생성하게 한 영웅의 영면(永眠)의 장소로 부끄러움이 없다.

김유신 장군은 금관가야국(金官伽倻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세손이며 부(父)는 서현(舒玄) 모(母)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 구해(仇亥)는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王)이었으며 신라에 나라를 바친 후 조부 무력(武力)부터 신라를 위해 헌신(獻身)하여 큰공을 세웠다. 김유신 장군은 부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로 있었던 진평왕 17년(595) 임지인 지금의 진천(鎭川)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고 17세 때에는 단석산(斷石山)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수도하였다. 그 후 풍운(風雲)이 회오리치는 삼국상쟁(三國相爭)을 맞아 신라의 국운을 위난(危難) 속에서 개척하여 드디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데 중추적(中樞的)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업적과 공은 천추(千秋)에 빛낸 뿐 아니라 삼국을 한 나라로 만들어 민족 생성의 터전을 닦은 것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있는 한 그의 공은 불멸이라고 할 것이다. 흔히들 식자간(識者間)에 "그의 업적은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쳤으니 높이 평할바가 못된다."고 하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는데 이들은 민족이 이루어지 이전에 삼국을 합하여 하나의 통치권 밑에 두게 함으로써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언어와 풍속 그리고 생활양식과 문화권 등을 같이 하며 역사적 운명을 함께 하는 소위 "민족(民族)"을 생성하게 해뜬 공을 알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공(功)은 삼국을 합하여 한 나라로 했고 위(位)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이었으며 무열왕(武烈王)의 처남에 문무왕(文武王)의 외숙이요 다시 무열왕의 사위로 왕가와 관계가 이중으로 다져진 처지니 일인지하(一人之下)에 만인지상(萬人之上)이 아니라 일인(一人)보다도 오히려 더한 세력을 누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내 일신(一身)을 처함은 겸손과 근엄함을 다 했고 임금과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홍모(鴻毛)보다 가볍게 여겼으며 아들 원술(元述)에 대한 교훈에서 보는바 와 같이 온 가족이 충성의 권화(權化)와도 같았으니 참으로 만고의 귀감이라 않을 수 없다. 문무왕 13년(673) 7월 1일에 79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김유신 장군의 묘는 송화산 중턱에 자리잡고, 어느 왕릉 못지 않게 호화로운 묘로 우수한 조각 솜씨를 보이는 12지신상이 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진위(眞僞)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논쟁이 심하다. 논쟁은 일제시대에 일본인 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신라의 많은 왕릉들이 확실한 물증에 의해 정확히 가려진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신라는 너무 먼 시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능의 진위에 대해서는 김유신 장군의 묘가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김유신 장군의 묘가 왕릉 못지 않게 호화로운 것은 그가 죽은 후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 묘가 다시 꾸며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 장군 묘 아래 계곡에는 묘의 재실(齋室)인 금산재(金山齋)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 장군이 죽은 뒤 그 부인(지소부인智炤夫人. 재매부인財賣夫人 두 이름이 있음)은 머리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는 부인이 죽은 뒤 장사지낸 곳 가까이에 송화방(松華房)이란 암자를 지었다고 하였다. 김유신 장군 묘가 있는 산이 송화산이므로 송화방은 이 근방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렇다면 부인의 묘도 장군 묘 가까운 어딘가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김유신장군묘 가는 길

 황성공원의 김유신장군 동상

 

김유신장군이 왕이 된 까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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