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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명활산성(明活山城)

노촌魯村 2009. 2. 12. 22:32

 

명활산성(明活山城)

명활산은 경주시 동쪽의 보문동에서 천군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표고 245m의 낮은 산이나, 신라의 건국 이전부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명활산은 대왕암이 있는 동해안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서 도성과 경주평야를 수호하기 위해 명활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명활산성의 시축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실성왕 4년에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명활산성은 천연의 요새로 수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 뿐만 아니라, 왕이 머무는 성으로서 자비왕 18년(475) 정월부터 소지왕 10년(488)까지 13년간 왕이 이 곳에서 거처하기도 하였다. 자비왕 18년 당시의 국제정세가 신라에 불리하여 평지에 있는 월성에 있기가 불안했던 것 같다. 당시 백제는 왜국과 손을 잡고 있어서 왜구의 침략이 거듭되었고, 장수왕 치하의 고구려도 남하정책을 강화하여 신라에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성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건으로 비담(毘曇)의 난을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에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여왕이 존재하는 한 나라가 옳게 다스려질 리가 만무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보수적인 귀족세력의 대표격으로서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왕군(王軍)이었던 김유신장군의 부대는 반월성에 본진을 두고 10여일간 공방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의 무리들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외치자 그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선덕여왕은 이 소리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김유신장군이 “길흉은 오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으며, 지(知)와 덕(德)이 요망한 것을 이길 수 있사오니, 성진(星辰)의 이변에 두려워하지 마시옵소”라고 아뢰어 여왕을 안심시켰다. 김유신장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연에 매달아 띄워 올리니, 마치 불덩이가 하늘로 올라 가는 것 같았다. 이듵날 김유신장군이 사람을 시켜 선전하기를, “월성에 떨어졌던 별이 어제 밤에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적군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또한 김유신장군은 백말를 잡아서 별이 떨어졌던 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악이 선을 이기고 신하가 임금을 이기는 괴변이 없기를 기도하였다. 마침내 김유신장군은 군사를 독려하여 명활산성에 주둔한 반란군을 총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삼국사기의 직관지(職官志)에 ‘명활전(明活典)’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이것은 명활산성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생각되며, 명활산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1988년 8월 26일 명활산성 축성비가 발견됨으로써 축성의 시기, 인력 동원, 성의 규모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건국 이래 수많은 외침과 국난을 겪어온 우리 선조들은 지형을 이용하여 성곽을 쌓음으로써 외적을 물리치며,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조상의 얼이 살아 숨쉬는 호국의 상징물인 성곽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거나 훼손된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혜와 용기로써 비담의 난을 평정한 김유신장군의 화랑정신을 되새겨보고, 책임감을 절실히 느끼면서 성을 축조한 신라인들의 마음자세를 본받도록 하자.

 

일정시의 명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