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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부산성(富山城)터

노촌魯村 2009. 2. 12. 22:41

23) 부산성(富山城)터

 

부산성터는 경주시 건천읍 서남쪽 오봉산(五峯山)의 산허리에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문무왕 3년에 쌓았다고 한다. 성 안에는 큰 창고와 샘이 있었다고 하며 원래의 모습과 같이 잘 남아 있는 남문자리가 있다. 이 부산성에는 화랑 죽지랑(竹旨郞)과 득오곡(得烏谷)의 신의와 풍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효소왕 때 화랑 죽지랑의 낭도로서 득오곡이 있었다. 득오곡이 한 열흘동안 보이지 않자 죽지랑은 그의 어머니를 불러 물어 보니 모량부의 익선이 득오곡을 부산성의 창직(倉直)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죽지랑은 득오곡을 대접하기 위하여 음식과 술을 준비하여 낭도 137명과 위의(威儀)를 갖추고 부산성으로 찾아갔다. 낭은 음식을 득오곡에게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돌아가자고했다. 그러나 익선은 굳이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간진이라는 사람이 죽지랑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30석(石)을 익선에게 주고 득오곡을 보내주도록 부탁했으나 익선은 허락하지 않았다. 진절이라는 사람이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을 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 : 화랑을 통할하는 사람)가 이 사실을 듣고, 익선의 그 더럽고 추한 짓을 씻어 주려고 사람을 보내 익선을 잡아 오게 했다. 익선이 도망하여 숨자 그의 아들이 대신 잡혀 왔다. 조정의 화주는 마음을 씻어 주기 위해 성 안의 못 속에 그의 아들을 집어 넣어 목욕시켰더니 한 겨울이라 얼어죽어 버렸다. 효소왕도 이 말을 듣고 익선의 태도에 분개하여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모두 쫓아내고, 모량리 사람은 승려가 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미 승려가 된 사람이라도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익선이 득오곡을 놓아 줄 때 재물을 탐낸 것은 현묘한 풍류도의 입장에서 볼 때 추하고 비루한 짓이었다. 조정의 화주와 국왕까지도 탐욕과 불의에 분개하여 지나칠 정도로 벌을 내린 데에서 당시의 시대정신이 맑고 청신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이야기에서 화랑과 낭도 사이에는 인간적인 신의와 두터운 우정으로 맺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랑도의 힘은 이러한 결속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득오곡이 지은 모죽지랑가에는 죽지랑에 대한 사모의 정이 나타나 있다.

모죽지랑가(募竹旨郞歌)

간 봄 그리매

모든 것사 설어 시름하는데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러 하옵내다

눈 돌이킬 사이에 나마

만나뵙도록 지으리이다.

낭(郎)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까.

(1)부산성(富山城) 지맥석(持麥石)

부산성은 신라의 왕경인 금성의 외곽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이 성에 주사암이라는 절이 있고, 바로 그 뒤쪽에 하나의 큰 반석(盤石)이 있는데, 이것이 지맥석(持麥石)이다. 이 지맥석은 왕경방비의 요충인 부산성 내에서 가장 넓은 반석으로 이 곳에서 김유신장군이 군사들을 모아 술을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에는 김극기(金克己 :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의 시서(詩序)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맥석은 4면이 깍아 세운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위는 평탄하여서 100명이 앉을 만하다. 김유신장군이 여기에서 술 빚는 자료로 보리를 저장하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말 발자국이 남아있다.

 

 

 

 

 

 

 

 성벽의 흔적

 성문 자리

 성문 자리

 

지맥석

 

 

 

일정시의 부산성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