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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원원사지(遠願寺址)

노촌魯村 2009. 2. 12. 22:39

22) 원원사지(遠願寺址)

 

 

(1) 문두루도장(文豆婁道場)

 

경주에서 약 50리(里) 가량 울산쪽으로 가면 경주시(慶州市) 외동면(外東面) 모화리(毛火里)가 있다. 여기에서 동북(東北) 골짜기로 약 30분 가량 거슬러 오르면 부석사석축(浮石寺石築)과도 비견(比肩)할 만한 석축이 꽤 길게 나타나고 여기에 폐사지(廢寺址)를 볼 수 있다.

이 절은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세운 금광사(金光寺)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중심도장(中心道場)이 되었던 유서(由緖) 깊은 절이다. 신인종이란 선덕여왕(善德女王) 4년(635년) 명랑법사가 당(唐)에서 귀국할 때 처음으로 신라에 전한 신인비법(神印秘法)을 씀으로써 보급된 밀교(密敎)의 일파(一派)로서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종파(宗派)이었다. 그는 문무왕(文武王) 때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밀단(密檀)을 마련하고 문두루비법을 베푼어 당병(唐兵)의 침입을 물리친 것을 계기로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신라호국불교의 전위적(前衛的) 역할을 하였다.

원원사는 그 밀교의 후계자들인 안혜(安惠), 낭융(朗融) 등과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 국사를 논의하던 중요한 인물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護國寺刹)이다. 김유신은 모두가 잘 아는 가장 이름 높은 명장(名將)이지만 김술종공도 역시 진덕여왕(眞德女王)대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에 김유신공을 따라 부사(副師)가 되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죽지랑(竹旨郞)은 바로 김술종공의 아들이었다.

또 사대덕(四大德:안혜安惠,낭융朗融,광학廣學,대연大緣)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이 때문에 사영산조사암(四靈山祖師岩)이라 했는데, 광학, 대연은 고려 태조를 따라 송도(松都)로 간 사람이어서 이 절의 창건에 관여한 밀교승(密敎僧)은 안혜, 낭융뿐이라 할 수 있다.

 

(2) 동서(東西) 삼층석탑(三層石塔)

 

사지(寺址)의 석계(石階)를 오르면 수려한 석탑 2기가 외로이 서있다.

이 탑은 다른 것들에 비하여 탑신(塔身)이 가늘어 가냘픈 느낌이 들지만 이러한 약점을 탑에 조각된 사천왕상(四天王像),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보강해 주고 있다. 비교적 크고 안정된 이중기단의 십이지상 조각으로 말미암은 것 같다.

이 탑은 1933년에 이미 도괴(倒壞)되었던 것을 일본인 能勢丑三氏가 복원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산충기단에는 한 면에 삼구(三軀)씩 연화대 위에 앉은 십이지신상을 부조(浮彫)하였다. 평복의 천의는 아름답게 휘날리고, 앉은 자세는 고요하여 신라십이지신상 가운데 가장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 손은 앞가슴에 모은 공례(供禮)의 자세로, 수호신(守護神)으로서의 십이지상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일층탑신엔 거의 원각(圓刻)이나 다름없는 힘찬 사천왕상이 강하게 부조되어 있다. 아마도 이 사천왕상은 신라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픔일 것이다.

따라서, 이 탑의 특색은 건축으로서의 조탑형식(造塔形式)에서 보다는 수식적(修飾的)인 면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하겠다. 사천왕은 제석천(帝釋天)의 권속(眷屬)으로 수미(須彌)의 사주(四洲)를 수호한다. 지국천(持國天)은 동주(東洲)를, 증장천(增長天)은 남주(南洲)를, 광목천(廣目天)은 서주(西洲)를, 다문천(多聞天)은 북주(北洲)를 수호하는데 동양사상의 큰 범주(範疇)로 보면 사방신(四方神)이라 말할 수 있고, 약사불(藥師佛)의 권속(眷屬)인 십이지신상도 십이시신(十二時神) 혹은 십이방위신(十二方位神)이라고 추상(抽象)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수호의 관념에서 나타난 것들이며 호국사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십이지신상은 불교석탑에 나타나기로는 이 원원사탑에서 비롯되는 것 같으며 8세기 중엽 경덕왕대(景德王代)에 건립된 것 같다.

왜냐 하면, 탑에 십이지신상, 사천왕상 등의 부조장식이 가해지고 매우 통일된 정제성(整齊性)을 갖는 석탑구조가 이 시기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한편, 동편 계곡에는 3기의 부도(浮屠)가 있으며, 최근 서편 계곡에서도 1기의 부도가 발견되어 도합 4기의 부도가 있는 셈인데, 그것들은 모두 고려 이후의 작픔으로 추정된다.

 

(3) 우물터

 

원원사 금당터 왼쪽으로 조금 가면 아주 작은 누각이 하나 있다. 누각 문을 열고 들여다보면 용왕을 모신 그림이 벽면에 그려졌고 바닥에는 생각지도 않은 우물이 있다. 우물과 이어진 구멍이 누각 밖으로 뚫려 있으며 이 구멍은 움푹하게 물길을 낸 돌을 토해 하수구로 연결되어 있다. 절에서는 ‘용당’이라 하였다. 우물 하나에 들인 정성이 놀랍기만 하다.

 

 원원사지 계단

 원원사지 금당터

 

원원사지 동탑

 

 

 

 

 

 원원사지 맷돌

 

원원사지 서탑

 

 

 

 

                   

              

 원원사지 석등

 원원사지 우물

 배수로

 배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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