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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감은사지(感恩寺址)

노촌魯村 2009. 2. 12. 22:37

 

  감은사지 전경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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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에서 본 대왕암 항공사진(경주시청 자료.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 

20) 감은사지(感恩寺址) 

 

 2010년4월14일 촬영

 

 

 

서탑

동탑

감은사지는 경주시 양북면 대본리에 있다. 경주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34km, 포항에서는 32km 정도이다.

사지의 동쪽, 동해 바다 가운데 있는 대왕암이 바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이며,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父王)의 성덕(聖德)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문무왕은 재위한 지 21년 만인 681년 세상을 떠났는데 늘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佛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했고 신라강토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던 불세출의 영주(英主) 문무왕은 동해구(東海口)에 가람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절을 완공하기 전에 왕이 돌아가셨으므로 그의 유언을 따라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安葬)하였던 것이다.

한나라의 군왕으로서 사치와 영화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죽어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고(勞苦)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화장(火葬)하여 산골(散骨)할 것을 당부한 유조(遺詔)는 그 탁월한 인격을 짐작하게 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통일의 대업은 결코 김유신 장군의 개인 용맹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김춘추의 능란한 외교 수완으로만 얻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힘이 솟을 수 있도록 솔선수범했던 군왕(君王)의 배려와, 또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무명유명(無名有名)의 일반민중들의 힘이 응결(凝結)되었을 때 가능하였던 것이다. 백성과 왕실의 이념을 하나로 지탱하게 해 준 힘이 바로 불교였으며, 검약(儉約)과 절제(節制)의 규범(規範)을 솔선수범한 이가 바로 문무왕이었다

이러한 실천적 이해에 따른 창조적 노력의 위업은 신문왕에게 계승되어졌고 그후 경덕왕대에 이르는 동안 신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강성과 번영을 누리고 찬란한 민족문화의 금자탑(金字塔)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왕은 등극하면서 곧 부왕의 뜻을 받을어, 미처 마치지 못한 역사(役事)를 진행시켜 즉위하던 해(681)에 절을 이룩하여 감은사라고 했다.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화룡(化龍)한 문무왕이 조수(潮水)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감은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쌍탑이 배치된 전형적인 통일후의 양식에 따라 건축된 것이다. 이러한 배치의 양식은 사천왕사. 남산사. 원원사 등의 그것과도 동일한 것인데, 단지 지형에 따라 쌍탑간의 거리나 금당의 위치 등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감은사지는 지형으로 보아 대종천이 동해로 들어가는 어귀의 용당산(龍堂山) 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 열거한 다른 사지들에 비해 볼 때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다른 곳보다 터가 조금 높은데다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대왕암에서 감은사가 보일 수 있도록 배치한 점이나, 금당에 용혈을 판 점 등은 신라인들의 세심한 신앙적 배려를 나타내는 것이다.

 

** 신비스러운 피리 ** 

절을 낙성한 후 신문왕은 이 곳에서 신비스러운 피리를 얻었다. 그 피리는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던 문무왕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라 피리를 얻게 된 경위를 더듬어 보자.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고, 선고(先考)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이듬해 5월 초하루 해관(海官)이 아뢰었다. "동해 안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진호(鎭護)하시고, 또 김유신공은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다시 나시어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聖人)께서 덕을 같이하여 나라를 지킬 보물을 내어 주시려하니 만약 폐하꼐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진귀한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 사중기록寺中記錄에는 처음 용이 나타났던 곳이라 했다. 지금 대본초등학교 건너편이며 사적 159호로 지정되어 있다)에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피게 했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사자(使者)가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그날 밤 감은사에서 유숙하였다.

이틑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을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둑컴컴해지더니 일 주일이나 계속되다가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서 그 산 속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용을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아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인가"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대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징조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 장군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같이하여 이 같은 무가대보(無價大寶)를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대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비단과 금옥(金玉)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 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 서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마쳤다. 태자 이공(理恭 이분이 곧 효소왕이다.)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경하(慶賀)하며 아뢰었다." 이 옥대의 눈금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떻게 아는가?"라고 왕이 바문하자 "눈금을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서 그것을 보이겠습니다."하고 왼쪽 둘째 눈금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한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서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 온갖 파도를 가라앉히는 피리)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4년(693)에 부례랑이 살아 돌아왔던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만파식적]

 

이 설화의 진위(眞僞)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기보다는 그러한 설화를 낳게 한 호국의 얼이 서린 감은사이고, 그것은 또한 불교와 밀착되었다는 것이 주목의대상이 된다. 신라의 고토(故土)에 세워진 황룡사. 사천왕사 등의 큰 사찰은 모두 불력에 의해 조국을 지키려는 강인한 집념으로 이루어진 절들이다. 이러한 호국적인 기풍은 특히 초기 신라불교에 있어서의 한 특징적 면모이었다고 간주(看做)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찌기 원광(圓光)법사는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의 해(害)를 도모하는 것은 출가사문(出家沙門)의 할 바가 아니지만, 빈도(貧道)가 대왕의 땅에서 대왕의 초목으로 살아가니 어찌 그 뜻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자장이 원광의 기풍을 계승했고, 원효와 의상이 또한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이 불법을 수호한다는 것과 다르게 이해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나라는 바로 옳은 법(法 진리)의 나라라는 자부와 긍지기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존망을 눈앞에 두고 혼자만의 안일을 바라지 않은 것이 그들의 기품이었다.

페허가 된 감은사지와 그 앞바다의 대왕암을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역사의 흐름을 올바른 궤도 위에 올려 세우려는 끈질긴 노력을 포기하여 본적이 없는 불교의 맥박을 느껴야 할 것이다.

 

**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선생의 "경주기행의 一節" 중에서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偉蹟)을 찾아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길러 보아라. 태종무열왕의 위업과 김유신의 훈공이 크지 아님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기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르지기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건천의 부산성도, 남산의 신성도, 안강의 북형 산성도, 모두 문무왕의 국방적 경영이요, 봉황대의 고대(高臺)도, 임해전의 안압지도, 사천왕의 호국찰도, 모두 문무왕의 정경적(政經的) 치적이 아님이 아니나 무엇보다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으라

 

** 대왕암(大王巖)의 노래 **

                                               고유섭(高裕燮)

대왕의 우국성령(憂國聖靈)은

소신후(燒身後) 용왕(龍王)되자

저 바위 저 길 속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나는

적귀(賊鬼)를 조복(調伏)하시고

우국지성(憂國至誠)이 중(重)코 또 깊으심에

불당(佛堂)에로 들으시다

고대(高臺)에도 오르시다

후손(後孫)은 사모(思慕)하여

용당(龍堂)이요 이견대(利見臺)라더라

영령(英靈)이 환현(幻現)하사

주이야일(晝二夜一) 간죽세(竿竹勢)로

부왕부래(浮往浮來) 전(傳)해주신

만파식적(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에 감은고탑(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대종천(大鐘川) 복종해(覆鐘海)를

조작(鳥鵲)아 뉘지마라

창천(蒼天)이 무심(無心)커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미물(微物)이라도

뜻있어 운다하더라

(1940. 8. 1 高麗時報)

 

** 사리함이 발견된 감은사의 삼층석탑 ** 

1970년 문화재관리국은 사지(寺址) 주위에 철책을 둘러 함부로 넘어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1966년 감은사의 서편 삼층석탑 안에서 보연형(寶輦形 임금이 타는 수레의 모습)의 사리함이 발견된 사실로 말미암아 갑자기 내외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뒤의 일이다. 이 사리함은 청동제(靑銅製)이며 화려하게 새겨진 연화판 위에 대중복부(臺中腹部)를 놓아 네 모서리에는 여덟 개의 감실(龕室)을 만들고, 각각 일구(一軀)씩 팔부신장을 안치하였다. 중심부분에는 보주형(寶珠形)의 사리소탑(舍利小塔)을 안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4 개의 모서리에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天人)의 좌상(坐像)을 배치했다. 섬세하게 세련된 수식(垂飾)은 신라인의 고상한 정신성을 드러내 보여 준다. 이 유물들은 일괄해서 보물 제266호로 지정되어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감은사지의 삼층쌍탑은 제일 윗부분의 찰주(擦柱)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현존하는 한국탑파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때부터 성덕왕대에 이르는 시기의 석탑은 모두 기단이 중층으로 되어 있고, 초층옥신은 4 개의 우주(네 모서리의 기둥돌)가 별석(別石)으로 다듬어졌고, 옥석의 상부 낙수면은 아무런 층절(層節)이 없는 경사면이다. 또 그것이 삼층이건 오층이건간에 옥석의 받침은 모두 5단을 이루고 있다.

감은사지 석탑의 경우 정상의 상륜부에는 철제 찰주가 솟아 있는 것만 다른 탑과 다를 뿐, 전체의 균형과 양식은 전술한 공통점에 조금 벗어남이 없는 것이다. 삼층탑의 높이는 9.1m, 찰주의 3.9m, 총고 13m에 이른다. 이 탑이 서 있는 감은사지에서 출렁이는 바닷속의 대왕암을 보느라면 護國大龍이 된 문무왕의 포효(咆哮)가 들리는 듯하다.

 

*** 이견대(利見臺) : 주역(周易) 가운데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大人)이란 글귀에서 인용한 것으로,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통하여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됨

***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大人)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볼 것이라는 말로 여기에서는 보물을 뜻한다. 

 2010년 6월8일 촬영

 

 

 

 

 

 

 

 

 

 

 동탑 해체 수리

 

 

 

 

 

 

 감은사지 용답

 

 

 

 

 

 경주 문무대왕과 감은사지(한국사의 이해)

 

감은사지 동서 삼층탑의크기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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