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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율포(栗浦)

노촌魯村 2009. 2. 12. 22:57

3) 율포(栗浦)

박제상이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떠났던 발선처는 율포(栗浦)였다. 율포는 현재의 울산광역시 강동면 정자리의 조그만한 포구이다. 이 정자9리의 포구에는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작은 포구이지만 멀리서 바라 볼 때 아늑한 항촌(港村)임을 느끼게 한다. 5세기 초반에는 군사적 요충이었을 것이며, 지금의 눈으로는 작은 항구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넉넉히 출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제상은 신라 최초의 순국 열사 이다. 삽량주간(歃良州干)의 벼슬에 있을 때부터 굳세고 용감하며 또한 지모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고구려에 가서 왕의 동생 복호(卜好)를 무사히 구출해 온 후 왕에게 하직 인사만 올리고 집에는 들리지도 않고 돋장 율포에 이르렀던 것이다. 왜국에 남아 있는 왕의 동생 미사흔마저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이 율포를 뒤에 두고 박제상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왜국에서 그는 지략을 써서 미사흔의 구출에 성공하지만 그 대가로서 목숨을 바쳐야 했다. 일본에서 그의 의연한 최후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왕의 동생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 앞으로 끌고 갔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들에게 말하겠소?”

“이제 너는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5형(五刑: 피부에 먹물을 넣는 것, 코를 베는 것 등 옛 중국의 다섯 가지의 형벌)을 내릴 것이고 만일 나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후한 녹을 상으로 줄 것이다.”

“차라리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겠소.”

죽음을 앞에 두고도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했던 당당함에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신라에는 생명을 던져서라도 지킬만한 정신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현묘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풍류도 정신인 것이다. 풍류도 정신, 즉 화랑정신은 민족역사의 출발점에서부터 우리나라 전역사를 관통하여 우리 민족의 혈맥 속에 흐르고 있는 정신이다. 박제상은 신라인이기를 포기하는 것 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던 것이다. 왜왕은 심한 굴욕감으로 박제상의 발가죽을 벗기고 새잎 위를 걷게하고, 벌겋게 달구어진 쇠덩이 위에 서게 하였지만 그 극심한 고통도 박제상을 꺽지 못하였다. 왜왕은 결국 그를 목도(木島)에 보내어 불에 태워 죽게 하였다.

박제상의 의연하고 당당했던 죽음 이후 1세기를 지나면서 수많은 화랑들이 나타나 젊음을 던져 나라를 구하였다. 신라 최초의 순국 열사였던 박제상은 이 포구에서 떠나 영원히 돌아 오지 않았지만, 그의 충성스럽고 굳세고 용감한 혼은 이 땅에 그대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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