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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치술령(鵄述嶺)

노촌魯村 2009. 2. 12. 22:56

2) 치술령(鵄述嶺)

치술령(鵄述嶺)은 박제상부인 금교김씨(金校金氏)와 관련된 유적지이다. 해발 765m의 높은 산으로 경주시와 울산시의 경계인 동시에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의 도계를 이루고 있다. 신모사당지(神母祠堂址)가 있는 산 정상에서 맑은 날씨에는 울산만을 건너 멀리 대마도가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당시 사당의 울타리였던 토축대와 그 앞으로 가로 10m 세로11m 넓이의 대지가 있어, 여기에 신모사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치술령의 산마루에는 부인의 몸이 화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큰 바위가 두 군데 있다. 울산광역시 두동면 만화리에서 올라가면 암벽에 ‘망부석(望夫石)’이라 한자로 새긴 큰 바위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 큼직한 바위가 두 개 더 있다. 부인과 함께 죽은 그의 두 딸이라 한다. 여기에서 치술령 정상을 넘어 동쪽으로 약 50m 내려가면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솟아 그 아래 10여m의 절벽을 이루는데 이 바위 또한 망부석으로 불리운다.

치술령의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 해밯 372m의 국수봉(國守峰)으로 이어진다. 국수봉 아래에 은을암(隱乙巖)이라는 바위굴이 있는데, 부인의 혼이 치술조(鵄述鳥)로 화하여 들어 갔다는 바위굴이다. 박제상에 대한 신라인의 흠모와 연민의 정은 그의 가족들에 이어져 많은 일화를 후세에 남겼다.

고구려에서 돌아 온 후 왜국으로 떠난 님이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밀쳐 버린 우직한 님이었다. 그 뒷 모습이라도 보고파 갔건만 문천(蚊川)의 모래벌은 끝없이 길고 님은 멀리 가 버렸다. 부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으로 주저앉아 벌지지와 장사의 지명만 후세에 남겼다.

얼마 후 일본에서 미사흔의 배가 돌아왔다. 30여년 만에 돌아온 미사흔과 국왕 형제가 해후하여 온 나라의 경사가 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그리던 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눌지왕은 돌아오지 못한 박제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여 위로하고 그 은공을 보답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마음은 바다 건너에 있을 뿐이었다. 부인은 딸 셋과 함께 왜국으로 가는 뱃길이 잘 보이는 치술령으로 올라갔다. 언젠가는 굳세고 당당한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리라 믿을 뿐이었다. 부인은 망망한 동해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치술령 정상에서 발돋움하여 기다렸다. 목메이게 님을 부르며 한없이 기다렸다. 그리운 님을 영원히 잃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훗날, 부인과 세 딸중 두 딸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만 화해서 돌이 되었다고 믿게 되었으며 이 돌을 망부석이라 불렸다. 그리고 부인의 넋은 치술조(鵄述鳥)라는 새가 되어 은을암의 굴 속으로 날아 들어 갔다고 한다. 은을암(隱乙巖)은 새가 숨은 바위굴이라는 뜻이다. 또 조정에서는 세 모녀를 호국3여신으로 모시고 치술령 정상에 신모사(神母祠)를 세워 제향을 하였다고 한다.

신라 사회는 사실 성적(性的)으로 자유분방하고 개방된 사회에 가까웠다. 그러함에도 신라인들은 망부석과 은을암 이야기를 사실로서 믿고 싶었다. 여기에는 사실 이상의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과 정절은 여성의 높은 품격인 것이다. 더구나 호국3여신으로 신격화된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1,500여 년 전에 이미 금교부인과 같은 품성의 여성이 있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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