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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팔공산

파계사

노촌魯村 2009. 7. 4. 22:21

 

                                          파계사 일주문

동화사에서 서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파계사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팔공산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심지왕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계관법사가 중창하였으며, 그후 숙종연간에 현응스님이 새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절의 좌우계곡에서 흐르는 9개의 물줄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모은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파계사(把溪寺)라 했다 하니, 주위 자연경관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맑고 깨끗한 계곡수를 낀 영조의 원당사찰인 파계사를 둘러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문화재
파계사 목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 파계사 영산회상도-후불탱화(보물 제1214호). 파계사 설선당(문화재자료 제7호). 파계사 산령각(문화재자료 제8호). 파계사 적묵당(문화재자료 제9호). 파계사 진동루(문화재자료 제10호). 파계사 기영각(문화재자료 제11호). 파계사 영조대왕의 도포(중요민속자료 제220호). 파계사 원통전(유형문화재 제7호)

 

파계사 일주문의 <팔공산 파계사> 현판(회산 박기돈 선생이 쓴 '팔공산 파계사’ 현판)

 

 일주문의 천장

파계사진동루(把溪寺鎭洞樓 문화재자료 제10호(동구))

파계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원래 물줄기가 9갈래로 흩어져 있어 물길을 모은다는 뜻에서 ‘파계사(把溪寺)’라 하였으며, 누각은 파계사라는 이름으로는 부족하여 기를 진압한다는 뜻에서 ‘진동루(鎭洞樓)’라 하였다. 진동루는 조선 숙종 41년(1715)에 지었고, 그 뒤 1970년과 1976년 두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2층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누각의 1층을 통로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중·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물줄기가 9갈래로 흩어져 있다하여 물길을 다시 모은다는 의미로 파계사라 이름하였으나 이것만으로는 기(氣)를 제압할 수 없어 주변 골짜기의 지기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진동루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진동루에 걸린 <팔공산 파계사> 현판

 

 

 파계사원통전(把溪寺圓通殿 시도유형문화재  제7호 (동구) )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앞면 3칸·옆면 3칸에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일반적인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원통전 용마루 가운데 청기와 한 장

 원통전 현판

                                                                                          문화재청 자료 사진

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大邱把溪寺乾漆觀音菩薩坐像및腹藏遺物 보물  제992호)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가 세운 파계사에 유리상자를 씌워 단독으로 모시고 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세종 29년(1447)에 다시 만들었다고 적혀 있어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전체 높이는 108.1㎝이며 머리에는 꽃모양을 정교하게 붙인 3중의 높은 관이 묵중하게 씌여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쪽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으며, 왼손은 약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하여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옷깃이 양쪽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 오른발 끝을 덮은 점이라든가, 가슴과 양팔, 무릎 등 전신을 감싼 화려한 장식, 무릎 밑에 보이는 물결무늬 등에서 앞시대의 영향이 나타난다. 근엄한 표정, 두터운 옷, 손모양, 가슴위로 올라온 치마를 주름잡아 끈으로 고정시킨 것 등은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과 비슷하며, 고려 후기 불상의 전통적인 특징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출처:문화재청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의 엑스레이사진(출처:불교문화연구소)

                                                                                    문화재청 자료 사진

 파계사영산회상도(把溪寺靈山會上圖보물  제1214호)

석가가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크기는 길이 340㎝, 폭 254㎝이며 비단 위에 채색되었다. 중심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두고 좌우대칭으로 여러 보살과 무리들이 석가를 에워싸고 있다. 주로 녹색과 붉은색을 사용해 밝고 화려하며 옷에 칠해진 금빛이 매우 찬란하다. 이 그림은 다른 영산회상도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조선시대 불화에서 석가여래의 광배는 몸뒤의 신광과 머리의 두광을 함께 표현하는데 비해 이 그림은 신광만을 표현했다. 둘째, 부처님의 옷에 밭 전(田)자 무늬가 그려져 있지 않았고 셋째는 부처의 오른쪽 발목에 꽃잎장식이 보이지 않는 점이 그러하다. 능숙한 붓놀림과 화려한 채색 등이 매우 돋보이는 18세기 초를 대표하는 불화이다. 이 영산회상도는 조선 숙종 33년(1707)에 왕실에서 뜻을 모아 제작한 것으로 자료적인 가치도 매우 높은 작품이다(출처:문화재청

 영조대왕의도포(英祖大王의道袍.중요민속자료  제220호 )(문화재청 자료사진) 

  영조대왕의도포(英祖大王의道袍.중요민속자료  제220호.대구박물관 )  

이 도포(道泡)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음보살상을 금칠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의하면, 그 제작연대가 건륭5년(1740) 9월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대법당을 개금하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다. 이 때 영조대왕은 탱불 ·일천불을 희사하고 이곳을 불상을 공양할 원당으로 삼았으며, 성상의 ·청사상의를 복장하여 만세유전을 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왕의 도포(道抱)를 내렸다고 한다. 도포는 조선시대에 왕을 비롯하여 사대부의 외출복으로 입혀졌던 옷으로 기록이나 유물은 16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형태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가 달린 것으로 뒷자락이 2중구조로 된 특징이 있다. 길에서 내려오는 기존의 뒷자락이 있으며 앞의 무가 뒷자락 안에 붙어 있어 뒷자락이 2단으로 분리되어 있다. 18세기 풍속화 중 도포를 착용한 모습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뒷자락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조의 도포는 무늬 없는 사(紗:은조사)로 된 홑옷으로 현재의 색상은 연한 녹색빛을 보인다. 소매는 넓은 두리 소매이며 깃의 모양은 못판깃과 당코깃 모양이 합쳐진 반당코깃(반목판깃)이다. 일반인의 도포가 곧은깃(직령깃)인데 반하여 반목판깃의 형태여서 서민과 왕족이 사용한 도포의 양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본 유물은 전세 유물 도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왕이 착용하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로 형태와 색이 비교적 완전하여 복식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자료)

( 문화재청 자료사진)

 

 원통전 벽화 동쪽 측면

 원통전 벽화 서쪽 측면

 

 

 

 파계사 배례석

 파계사 설선당(문화재자료 제7호)

 설선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원통전을 중심으로 적묵당과 마주하고 있다. 1623년(인조1) 계관법사에 의해 창건되어 두 차례(1646, 1725)에 걸쳐 중건하였고 1762년 지붕을 다시 잇는 공사를 시행한 후 1976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로 전체적인 모습이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며, 구조양식은 고복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공포가 갖추어지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이 건물은 대중식당과 강습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조양식과 가구수법 등이 간결하면서도 견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파계사 기영각(문화재자료 제11호)

기영각은 영조대왕을 위해 기도한다는 뜻으로 이름한 전각이다. 1696년(숙종 35) 현응조사가 성전암(聖殿庵)과 더불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1974년과 1983년의 두 번에 걸친 보수공사가 있었다.  건물은 화강석 바른층 쌓기 기단 위에 건립된 정면 3칸, 후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구조양식은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주상에 주두와 함께 앙서와 수서를 장식한 외일출목 주심포계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주두와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 후기 공포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나 우물천장으로 가리어져 있다.

 

 기영각 내부

 

 기영각 천장화

기영각 천장화

기영각 천장화

 기영각 천장화

 파계사 산령각(문화재자료 제8호)

산령각은 산신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산신각은 산신을 봉안한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짐작케 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사찰 내에 봉안되게 되었다. 산신신앙은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조선시대 이후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파계사의 산령각은 창건년대는 알 수 없으나 화강석 외벌대 기단 위에 건립된 정면 1칸, 후면 1칸 규모의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구조양식은 화강석 정평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주상에 주두와 함께 앙서와 봉두를 장식한 초익공 양식이다. 3량가로 구성된 지붕하부 구조는 우물천장으로 가려져 있고 건물 내·외부에는 금단청을 올렸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번잡한 공포의 장식수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산령각 주심포

 

 산령각 벽화(직녀와 견우 상봉)

 산령각 벽화

 산령각 벽화

산령각 벽화(월궁서왕모)

산령각 벽화

 산령각 벽화

 

지장전

지장보살

극락전

 아미타여래 

파계사 범종각

파계사 하마비(비신(碑身)의 높이는 113cm, 폭 43cm, 두께 17cm로 원규형(圓圭形) 화강석)

이 비는 1693(숙종 19년)경 숙종이 현응대사에게 부탁하여 왕자(후일의 영조대왕)를 얻는데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입구에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를 세워, 왕실 원당에 감히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과 관료들로부터의 착취와 사역도 면하게 해주었다.

 

 파계사 사적비

건립연도는 1935년 5월로 회색 화강암 용머리로 장식된 비개(碑蓋)는 높이 65cm, 가로 83cm, 두께 48cm이며, 오석비신(烏石碑身)은 높이 160cm, 가로 59cm, 두께 32cm, 비부(碑趺)는 귀형(龜形)으로 높이 56cm, 가로 120cm, 세로 150cm 회색화강암이다. 신라 애장왕(800-808)때 심지왕사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회진된 것을 1605년(선조 38년) 계관법사가 원통전을 시작으로 설선당 등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파계사 삼창조사(三創祖師)인 현응대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선종현응당대사비

 1701년(숙종 36년)에 건립된 이 비석은 비신(碑身)의 높이 122cm, 가로 62cm, 두께 19cm이며, 비개(碑蓋)는 원래 없다. 비문은 해서로 현응대사의 출생과 업적, 사리 부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현응대사는 휘 영원(靈源), 시호 현응(玄應)으로 파계사를 삼창하고, 크게 중건하였다. 현응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에 대한 탄압이 심할 때 이를 탄원하러 한성에 간 현응이 숙종을 배알하게 되고 왕의 부탁으로 원자 탄신을 위한 백일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리하여, 숙빈 최씨의 몸에서 뒷날 영조 대왕이 될 세자가 탄생하고, 이 공으로 숙종 22년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원당(願堂)으로 삼게 하고 전답을 하사 받았다. 이를 통해 양반관료의 행패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1704년(숙종 30년) 11살된 영조가 「현응전(玄應殿)이란 편액을 써 내려주었다. 이 비석의 바로 옆에 현응대사의 부도가 있다.
파계사 주차장 입구에서 산으로 0.9km 올라가면 현응대사가 불사를 일으켜 만든 성전암(聖殿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