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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국외)/헝거리

부다성

노촌魯村 2010. 10. 20. 00:56

 

 겔레르트언덕에서 본 부다성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

 

부다성

부다페스트 상징 1호인 이곳은 웅장하며 우람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왕궁과 어부의 요세, 마티아스 성당은 누구나 발길을 향하게 만들고 밤에 보는 경관은 세체니다리, 국회 의사당과 더불어 단연 유럽에서 최고를 꼽는 다고 할 수 있겠다. 이곳에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버스와 후니쿨라, 그리고 걸어서 가는 방법이다. 산책로로 만들어진 10개가 넘는 계단 길과 언덕길은 이 곳 관광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역사

13세기 까지 이곳은 중요한 주거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1241-2년 몽고가 침입한 이후, 이전 수도 ‘에스테르곰’에서 피신해온 ‘벨라 4세’가 이곳 언덕에 성을 쌓았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게 되었다. 이 곳이 영구적인 왕실이 된 것인 룩셈브르그 가문의 왕 ‘지기시문트’ 기간(14세기 말-15세기 초)에 만든 새로운 왕궁이 만들어 지면서였다. 15세기에 마티아스는 고딕양식의 건물을 넓혔고 르네상스양식을 가미 시켰다. 이런 인간적인 왕궁은 크게 발전하여, 중부유럽에서 가장 대표적인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와 헝가리 황금기를 맞이 했다. 마티아스 왕이 죽은 뒤 국가가 쇠퇴하게 되었다. 1541년 터키가 헝가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으며 부자들 대부분은 쫓겨났고, 집들은 폐허가 되었다. 1686년 교황 '이너센트 11세’가 지원하는 기독교 연합군이 이곳을 다시 차지하였다. 터키를 물리친 것을 유럽에 알렸고 그 기념으로 모든 기독교 국가가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터키의 오랜 지배로 성은 폐허가 되었다. 마티아스 시절 8,000명이 성에 거주 했었지만 터키 이후 6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다음 세기에 재건을 하기 시작했다. 고딕 스타일이었던 거주지들을 바로크 스타일로 만들었다. 이런 흔적들은 지금 많이 볼 수 있는데, 고딕 스타일의 문 위에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올려진 건물들이다. 1703년 부다는 왕이 없는 도시가 되었으며 ‘합스부르크’가 비엔나에서 이곳을 유지해 나갔다. 반면에 헝가리의 중요한 기관들은 ‘브라티슬라바’(현 슬로바키아 수도)에 있었다. 1848-49년 독립전쟁으로 왕궁을 헝가리 인들이 차지하였으나 곧바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다시 차지하였다. 많은 집들이 심한 손상을 입었다. 지난 시기에 지어진 왕궁의 일부는 불에 탔다. 1873년 부다, 오부다, 페스트 지역이 통합 되면서 부다성은 다시 한번 번성하게 되었다. 새 왕궁과 정부 건물들이 들어 섰으며 마티아스 교회도 재건축 하고, 왕궁도 넓혔다. 2차대전 때인 1944-45년 겨울은 이전보다 많은 파괴가 있었다. 러시아의 붉은 군대에게 독일이 패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쟁이 물러 갔을 때 성에 사람이 사는 집은 없었다. 그 뒤 40년 동안 뼈아픈 재건이 있었으며 현재 대부분의 건물은 문화재가 되었다. 

 

 

 

 

 전쟁의 흔적 : 총탄 자국

 

 

 

 

 

 

 

 

 

 

 

 

 

 

 

 

 

 

 

 

 

 

 

 

 

 

 

 

 

 

 

 

 

 

 2차대전 때의 방공호

 

 

 

 부다성으로 올라가는 후니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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