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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

노촌魯村 2010. 10. 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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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사적  제150호.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였던 것을 새롭게 복원하기위해 해체 중에 있다. 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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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전시관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보물  제236호)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경북 영주시의 숙수사지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부석사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다.(문화재청 자료)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국보  제11호)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문화재청 자료)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국보  제11호) 해체 후  미륵사지석탑 자리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국보  제11호) 모형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옛 사진

(출처:조선고적도보)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국보  제11호) 석재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국보  제11호) 석재

 복원된 미륵사지 동석탑 

 

 

 

 

 

 

 

유물전시관 의 전시물

 

 

 

 

 

 

 

 

 

 

 

 

 

 

 

 

 

 

 

 

 

 

 

 

 

 

 

 

 

 

 

 

 

 

 

 

 

 

 

 

목탑모형 

 

 

 

 

 

 

금처럼 귀한 금()직물

 

머리카락 같아요!’

시커먼 유물 사진을 보며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이다. 머리카락처럼 시커먼 사진의 정체는 국보 제11호 백제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출토된 금직물이다. 무려 1,400년 정도 된 셈이라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상상 이상으로 정교하며 아름다운 직물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금강, 금산, 금수산의 지명은 비단처럼 곱다 하여 비단 금()’이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중국 한나라 사람 유희가 지은 석명(釋名)에는 금()이 합쳐진 글자로, 금직물은 제직하는 데 너무 힘이 들어 금과 같은 값어치를 지닌 비단이라고 전한다.

고대의 금()직물은 경사(날실)나 위사(씨실)에 두 가지 이상의 색실을 사용하여 다채로운 무늬를 짠 비교적 두툼한 고급 견직물의 한 종류이다. 염료가 희귀하던 시절 선명하게 염색한 색실은 자체만으로도 화려했으며, 경사나 위사에 한 올의 실을 엮어 짜는 것도 매우 어려운 작업인데, 수백 가닥의 색실을 번갈아 가며 문양을 짰으니 아마도 당시의 최고급 손기술이었음에 분명하다. 오죽하면 금처럼 귀하다 하여 금직물이라 불렀을까.

미륵사지 금직물은 경사 방향에 색실을 더해 문양을 짰기 때문에 경금직물이라 하며, 흑색 바탕에 적자색과 황색 실로 파선이 대칭을 이루는 테두리 문양을 갖추고 있다. 안타깝게도 1,400년의 장고한 시간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어 테두리 안쪽에 그려진 문양은 알 수 없다. 이러한 문양의 구성과 배치는 중국의 경우 6세기대 금직물에 해당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고대직물 중에서 테두리문양이 있는 금직물로는 최초의 발견이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저 새까맣게 보이는 한낱 직물 조각이지만, 금직물에 대한 제직기술과 문양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는 신라를 거쳐 일본까지, 서쪽으로는 소그드, 사산조 페르시아를 거쳐 이집트 콥트 직물까지 연결되는 당시에는 가장 핫한 아이템이었다. 우리는 바로 미륵사지 금직물을 통해 백제가 실크로드의 한 갈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백제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금직물>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학예연구사 안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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