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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신당(聖霞神堂)
울릉도 사람들이 배를 새로 만들어 바다에 띄울 때 반드시 와서 빈다는 곳이다. 마을 안쪽 솔숲에 있는 이 신당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설
조선 태종 때 김인우는 울릉도 안무사를 명받아 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 곳 태하동에 도착했다. 관내 전역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출항을 위해 잠을 자던 중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출항을 명령했다. 그러자 갑자기 풍파가 일더니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었다. 안무사는 문득 전날 꿈이 떠올라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섬에 남겨두고 무사히 육지로 돌아갔다. 몇 년 뒤 다시 울릉도 안무사의 명을 받고 태하리에 도착하여 수색을 했는데, 그 때 유숙하였던 곳에는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되어 있었다. 안무사는 동남동녀의 고혼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 곳에다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돌아갔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풍어, 풍년을 기원하고, 처음 배를 띄울 땐 반드시 여기에서 제사를 올려 해상작업의 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좌측에 ‘성하지남신위(聖霞之男神位)’, 우측에 ‘성하지여신위(聖霞之女神位)’라고 한 바와 같이 동남동녀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조선 초기 태종 17년 조정에서는 안무사 김인우를 보내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게 하였다. 섬 사람들을 모두 모아 출항을 앞 둔 날 밤 김인우의 꿈에 동해의 해신이 나타나 동남동녀 한 쌍을 울릉도에 두고 가라고 했다. 다음날 지난밤의 꿈을 잊어버리고 출항을 하려 하자 갑자기 풍랑이 일어 김인우와 울릉도 주민들은 배를 띄우지 못했다. 다음날도 김인우 일행이 출발하려 하자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일어 배를 띄우지 못하게 된다. 안무사 김인우는 꿈을 떠올리고 동남동녀를 뽑아 배에서 내리게 하여 자신이 기거하던 곳에 잊고 놓아두고 온 붓과 벼루를 가져오라고 했다. 두 사람이 붓과 벼루를 가지러 배에서 내리자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해졌다. 안무사 김인우는 급히 닻을 올리고 순풍을 받아 무사히 육지로 돌아 왔다. 육지로 돌아온 김인우는 울릉도에 두고 온 두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8년 뒤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안무사직을 맡겼다. 김인우가 자신이 기거하던 곳으로 가보니 꼭 껴안은 동남동녀의 백골이 있었다. 김인우는 그곳에 사당을 짓고 참회를 했다. 그 후 울릉도 주민들은 배를 진수할 때면 꼭 이곳에 와서 진수식을 올리고 무사한 뱃길이 되기를 기원한다.”
태종 17년 안무사 김인우를 울릉도에 파견한 사실은 태종16년 9월 경인일, 그리고 태종 17년 2월 을축일의 “태종실록”에서 확인된다. 이때 김인우의 보고에 의하면 울릉도에는 호 15구, 남녀 합쳐 86명이 살고 있었는데, 김인우가 그 가운데 2명만을 데리고 나왔다. 이에 조정에서 그 주민들을 색출하여 육지로 데려오기로 결정하고 김인우를 다시 보냈다. 이때를 배경으로 하여 성하신당의 동남동녀의 전설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8년 뒤(1425) 김인우가 울릉도에 들어가 꼭 껴안은 동남동녀의 백골을 발견하고, 그곳에 사당을 짓고 참회를 했다고 하였는데, 김인우가 세종 7년(1425)에도 울릉도에 안무사로 파견된 것 역시 “세종실록”에서 확인된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김인우는 울릉도에 오갈 때 태풍을 만나 무척 고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하신당의 동남동녀 전설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 전설은, 김인우가 이 당시 처음으로 신당(神堂)을 짓고 동남동녀를 성황신으로 모셨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1969년 3월에는 전설 속에 등장하던 동남동녀를 혼인시키는 행사를 올렸다고 한다. 안녕을 기원할 때, 동남동녀의 옷을 지어 바치곤 하는데, 이때부터 동남동녀에게 바치는 옷을 어른 옷으로 준비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동남동녀의 신상(神像)은 1970년 9월 15일 봉안되었다. 경로당의 회원들이 울릉군으로부터 보조금 4만원과 어업조합에서 백미 1석을 받아 추진하였다. 봉안식은 저동의 보살이 경문을 읽는 등 불교 의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1978년 2월 성황당을 성하신당으로 바꾸어 불렀다.(출처 : 디지털울릉문화대전)
태하의 풍경
오징어는 바다에 사는 한해살이 연체동물이며 몸은 원추형으로 길이 30~40㎝가량이고 적갈색의 작은 반점이 많은데, 몸빛은 대체로 암갈색이고 죽은 것은 희게 된다. 체벽 중에 있는 골절을 오적골이라 하여 약용으로 쓴다. 다리는 10개이며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는 먹이를 유인할 때 및 교미할 때는 근육이 신축되어 채색 변화를 일으키며 위급할 때는 먹물 같은 진을 내 뿜기도 한다.
울릉도 오징어는 개척 당시뿐만 아니라, 해방 전에만 하여도 해변에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육지에 가까이 다가왔다. 또 이 오징어가 가까이 오면 바다의 빛이 희끄무레 해졌다. 울릉도의 기후와 햇볕은 오징어 말리기에 가장 적당하다. 그래서 울릉도 오징어 맛은 매우 독특하다.
오징어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 되며 비타민, 무기류 등이 다량 함유되어 스태미나를 강하게 하는 강정식품이다. 육지의 건어물가게에서는 다른 지역의 건오징어가 울릉도산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구별하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울릉도산 건오징어는 귀 부위에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섬조릿대로 오징어의 귀 부위를 뚫어서 20마리씩 끼운 다음 덕장에 걸어서 말리기 때문에 생긴 구멍이다. 또한 고르게 건조시키고 미생물의 오염을 막기 위해 다리 사이에 ‘탱깃대’를 끼워 넣는다는 점도 울릉도 오징어의 특징이다. 반면에 빨래처럼 줄에 널어서 말리는 강원도산 오징어에는 귀구멍이나 탱깃대를 끼웠던 자국이 없다.(출처:디지털울릉문화대전)
황토굴
강원도 삼척의 어느 사또가 관기를 데리고 뱃놀이를 나갔다가 갑작스런 돌풍을 만나 울릉도에 닿게 되었다. 그 당시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당연히 식량을 조달할 수 없어 모두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리저리 먹을 것을 구하려고 헤맸으나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허기에 지쳐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황토를 발견하고 궁한 나머지 “이 흙이라도 먹어야지.”하면서 입에 조금 넣어 씹어 보았더니 그런 대로 먹을 만하였다. 결국 이 흙을 먹고 모두가 목숨을 연명했는데, 그 흙을 먹어 본 사람들은 그 맛이 모두가 다르다고 해서 이곳을 ‘황토구미(黃土九味)’라고 불렀다고 한다.(출처: 디지털울릉문화대전)
향나무
향나무
울릉도항로표시관리소(등대)
전망대
등대 전망대에서 본 공암. 현포항. 노인봉. 송곳봉
대풍감 향나무 자생지
경북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는 현재 유인 등대가 있다. 이 등대의 아래에 대풍령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 밑에는 시퍼런 바닷물이 출렁거린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배가 많이 드나들었는데, 배를 매어 두기 위해 바위에 구멍을 뚫었다. 또 돛단배가 움직이려면 바람이 불어야 해서 바람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대풍령(待風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풍령(待風嶺)에는 작은 구멍뿐만 아니라 큰 굴도 있었다. 주민들에 의하면, 그 굴이 육지까지 연결되어 있어 큰 도둑들이 이 굴을 이용하여 보물을 많이 훔쳐갔다고 하여 보다 못한 한 도인이 도술을 써서 큰 굴을 막아 버렸다고 한다.(출처 : 디지털울릉문화대전)
연자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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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재발견(울릉도 태하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