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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안국사(安國寺)

노촌魯村 2012. 7. 8. 09:19

 

안국사(安國寺.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말사.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934번지)

안국사(安國寺)는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934번지 적상산(赤裳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무주읍 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적상산은 특유의 붉은 색 퇴적암이 높이 400m의 절벽으로 산의 중턱을 감싸듯이 노출되어 있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것과 같다하여 산이름을 적상이라고 했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더욱더 그 이름을 실감하게 된다. 적상산은 산 정상이 넓은 분지로 되어 있어 평탄하고 물이 풍부하며 산 허리가 절벽이라 천연의 요새지인 셈이다. 산내에는 사적 제146호 적상산성이 있다. 북창리 입구에서 15㎞ 지점에 있는 안국사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서창(西倉)이나 북창(北倉)에서 한 시간 이상 좁고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난 1987년에 원광대학교에서 안국사를 발굴할 당시에도 길이 좁아 발굴에 필요한 리어카 등을 모두 짊어지고 올라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절 앞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찾는 길이 쉬워졌다. 본래의 안국사는 1989년부터 진행된 무주 양수발전소의 댐 공사로 인하여 수몰지구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1991년부터 남쪽 약 1㎞ 지점의 현재 자리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현재의 안국사 자리는 1949년에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던 호국사(護國寺)가 있던 곳이다. 무주읍지인 『적성지(赤城誌)』의 「적상산안국사기(赤裳山安國寺記)」에 의하면 안국사는 고려시대인 1277년(충렬왕 3)에 월인(月印) 스님이 창건했고,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러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절을 지었다고 한다. 곧 조선 태조 이성계가 국가의 만년대계를 위하여 무학 스님에게 명하여 복지(卜地)인 적상산에 성을 쌓고 절을 짓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고려 말인 1374년에 최영(崔瑩)장군이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뜻밖의 난리에 대비하도록 조정에 요청하여 성을 쌓은 사실이 있어 그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 중기까지 줄곧 절이 유지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이곳의 자연 경관이 뛰어나 일찍부터 불교 수행지로서 주목을 받았을 것은 틀림없다. 한편 1864년에 만든 <안국사중수기> 현판을 보면 옛 풍수가들의 건의에 따라 산성을 쌓고 성을 지킬 스님을 모집하여 그들의 거처로 이 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대한불교 진흥원 자료)

 

 

안국사극락전 (安國寺極樂殿.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전북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적상산 분지에 있는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이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적상산성을 지키던 승병들의 숙소로 지었다고 하며, 조선 광해군 5년(1613)과 고종 1년(1864)에 수리하였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이 지역의 신앙물로 천재지변을 몰아 낸다고 전하는 괘불이 있다. 절의 주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의 옛터가 남아있다. (문화재청 자료)

 

안국사목조아미타삼존불상(安國寺木造阿彌陀三尊佛像.전북 유형문화재 제201호.전북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

 안국사 극락전내에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미타여래좌상은 목이 짧고 움츠린 듯한 어깨에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턱이 짧아지고 각이 져 딱딱해 보이는 얼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려 엷은 미소가 번져나는 듯 하다. 오똑한 코에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법의는 통견의로서 왼쪽 팔로부터 흘러내린 소매자락은 대퇴부 쪽에서 발가락을 덮고 있다. 자연스러운 옷주름과 사실적 표현의 손으로 인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는 원만하며 높이 67cm, 무릎폭 43.5cm, 어깨폭 30cm 내외이다. 좌협시인 관음보살상은 옷주름이 본존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처리되었으며, 손 역시 사실감이 돋보인다. 머리는 관을 쓸 수 있도록 턱을 두어 짧은 상투처럼 머리를 묶어 올렸으며, 보관 아래쪽으로만 머리칼을 표현하였는데 귓바퀴를 한 번 감아내려 어깨 위로 흘러 내리게 하였다. 높이 63cm, 무릎폭 35.5cm, 어깨폭 26cm 내외이다. 우협시인 세지보살상은 손모양이 관음보살상과 대칭적이고 불의형(佛衣形) 법의를 착용하였으며, 턱이 보다 납작해지고 허리가 좀 더 구부정한 것만 다를 뿐 얼굴 형태 및 표정, 사실적인 손, 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조각 양식의 세부 특징이 관음보살상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높이 61cm, 무릎폭 36.5cm, 어깨폭 24cm 정도이다.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간 구부정한 자세에 굵고 짧아진 목, 납작해진 턱과 각진 얼굴, 오뚝한 코와 근엄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보이는 얼굴표정,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사실적 표현의 손 등 17세기 불상양식을 보이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안국사 극락전 단청설화

안국사의 주 법당으로 극락전을 지은 스님이 단청불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제가 지금부터 100일 동안 단청을 할 테니 극락전에 하얀 막을 치고 물 한 그릇만 넣어 주되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범상치 않은 노인을 말을 깊이 새기며 궁금증을 억누른 채 노인에게 단청불사를 맡긴 채 무사히 끝나기를 부처님께 기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구름이 걷히고 단풍이 떨어질 무렵의 어느 날, 스님은 천막 속의 단청불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청이 시작된 지 99일째 되던 날 그 호기심은 극에 달하여, 하루를 참지 못하고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붓을 입에 문 흰 학이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눈치 챈 학은 완성하지 못한 단청 일을 남겨 놓은 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안국사 극락전의 뒤편 한쪽에는 딱 하루거리에 해당하는 분량의 목재가 단청이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나뭇결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온통 학이 노닐었다’고 할 만큼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천장을 빙 둘러 날고 있는 학문양이 적지 않으니, 옛 이야기를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해가고 있는 사찰 측의 노력이 한결 운치있게 다가온다.

                  

안국사영산회괘불탱 (安國寺靈山會掛佛幀.보물 제1267호.전북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안국사)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인데,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길이 10.75m, 폭 7.2m 크기의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다보여래, 문수, 보현보살이 있고, 왼쪽에는 아미타불, 관음,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모니는 화면 중앙에 서 있는데 이목구비는 큼직큼직하며 건장하고 각진어깨, 노출된 가슴, 유난히 길게 늘어진 팔, 짧아 보이는 하체를 지녔으며 이렇게 크고 건장한 신체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듯하다. 인다. 녹색과 주황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회색, 분홍 등 중간색을 넣어 은은한 분위기를 나타내며 구름, 연꽃, 단청문양 등으로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의겸 등 여러 승려 화가들이 그린 이 그림은 본존불을 강조하여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정조 16년(1792), 순조 9년(1809)에 뒷벽을 새단장한 기록이 있어 승려화가인 의겸이 활약한 영조 6년(1730)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자료)

 

                     

극락전 앞 괘불대 : 옹정(雍正:청나라 연호 8년;1730년)이란 연호가 새져진 특이한 괘불걸이다.

 

 

                

천불전

 

 

           

지장전

 

삼성각

 

 

 

 안국사 돌두꺼비(石蟾) : 모두 부자되십시오 !!!

 

성보박물관(여러 나라 불상이 전시)

 

 

 

범종

 

 

 

 무주 적상산성 (茂朱 赤裳山城.사적 제146호.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 )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방어산성이다. 고려 후기 거란이 침입한 후 최영은 이곳에 산성을 쌓게 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도 반드시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다. 고려 때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이미 산성을 이용하여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이 피난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광해군 2년(1610) 이곳에 조선시대 5개의 역사책보관소 중의 하나인 적상산사고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였다. 실록전, 사각(史閣), 선원각, 군기고, 대별관, 호국사를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고 운영했다.
현재 성벽은 무너져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각과 기타의 건물들도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최근에 성 안에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문화재청 자료)

 적상산성호국사비 (赤裳山城護國寺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 전북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1602)

 적상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절인 호국사에 놓여 있는 비이다. 적상산은 4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요새를 이룬 곳으로, 고려 때 도통사 최영 장군과 조선의 체찰사 최윤덕이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던 곳이다. 고려말에 쌓은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시대에는 역사에 관한 기록이나 중요한 서적을 감추어 두던 사고(史庫)를 설치해 두었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켜왔던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조판서 이식이 왕의 명을 받고 이 산성을 둘러보니 사고의 보호가 허술하여, 왕께 보고하여 사찰의 건립과 승군의 모집을 허락받아 인조 21년(1643) 호국사를 창건하였다. 호국사는 전라감사 윤명은의 봉급으로 지었으며, 현감 심헌이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호국사라 이름지은 것은 삼장법사의 경축기도문에서 딴것이라 한다. 현재는 적상산의 양수발전소 건설 때문에 안국사가 호국사의 자리로 옮겨져 왔다.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문화재청 자료) 

적상산성호국사비(사진출처 : 문화재청)

 

                

안국사에서 본 구름 속의 덕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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