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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 만복사지 (南原 萬福寺址)

노촌魯村 2012. 4. 1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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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복사지 (南原 萬福寺址.사적 제349호.전북 남원시 왕정동 489)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터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발굴조사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의의가 크다.(문화재청 자료) 

       

                        

남원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 때 창건되었으며 남북 자오선을 중심 축으로 하여 남쪽에 중문, 그 다음 목조탑을 중앙에 두고, 목탑 좌우로 동금당과 서금당을 배치하고, 목탑 북쪽에 금당을 배치하였다.                                      

만복사지 가람배치도

만복사지와 만복사저포기

만복사는 남원의 객산 교룡산의 기운을 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진압사찰이다. 만복이란 의미도 누구나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원하면 복을 다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 「불우조(佛宇條)」를 보면, “기린산 아래에 있는데, 동쪽
에 오층전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이 있으며, 전 내에는 동불이 있는데, 길이가 35척(약 10.6m)이다.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숙종 때에 간행된 『용성지(龍城誌)』에는 “만복사 내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육전, 영산전, 보응전, 종각, 천불전, 나한전, 명부전 등의 불전이 있었으나 정유재란(1597)의 병화(兵禍)에 불타 잿더미가 된 뒤 사찰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만복사에는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약 10m의 불상이 있었으며,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만복사는 불타버리고 말았다. 조선 전기(15세기 후반)에 김시습이 남원시 왕정동에 있던 만복사를 배경으로 쓴 단편소설로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가 있다. 전라북도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은 일찍 부모를 여위고 만복사의 구석방에서 외로이 지내며 배필 없음을 슬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양생은 부처와 저포놀이를 해서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켜 3년간 궁벽한 곳에 묻혀서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 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다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나, 자기와 사랑을 나눈 여자가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의 혼령임을 알았다. 여자는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지고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어느 날 밤 여자의 말소리가 들리기를, 자신은 타국에 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는데, 그 미친 바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1979~1985년까지 전북대 박물관팀이 만복사지를 발굴조사 하고 복원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 고려초기에 창건 했고 가람배치가 1탑 3금당형식 였으며, 이곳은 고려시대의 가람배치를 확인 할 수 있는 유일한 절터라고 한다. 원래 대웅전, 천불전, 영산전, 종각, 명부전, 나한전, 약사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많은 전각로 가득한 사찰이 지금은 오층석탑, 석불입상, 석인상, 석대좌만 쓸쓸하게 지키고 있고, 복원해놓은 건물터로 옛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만복사지에는 수백 명 스님들이 수도를 했었고 그래서 남원8경중의 하나가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다. 이는 시주를 나갔던 만복사의 스님들이 저녁 무렵 때 맞추어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외에도 백뜰, 중상뜰과 같은 만복사의 번창을 알려주는 명칭들이 남아 있다. 만복사가 건립된 고려 문종 때부터 만복사 탑돌이와 토성밟기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온다. '만복사 저포기'에 보면 음력 3월 24일에 남원의 젊은 남녀와 지역 주민들이 만복사를 찾아와 향불을 피우고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이 때 토성밟기와 함께 탑돌이가 행해졌다. 탑돌이는 미혼남녀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1982년 그동안 단절되었던 만복사 탑돌이와 토성밟기를 남원문화원에서 처음 발굴 재현한 이래 2002년부터는 남원시 사암연합회와 불교신행단 연합회 주관으로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당장 만복사지를 복원할 수 없겠지만 만복사지를 찾았을때 '만복사저포기'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배꽃이라도 피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토성밟기와 탑돌이 행사를 좀 더 홍보하여 남원의
불교전통문화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었으면 한다.(출처 : 지역정보포털) 

한 그루 배꽃나무 적적함을 짝하니

시름도 많아라, 달 밝은 이 밤이여,

사나이 홀로 누운 외로운 창가에

어디서 들려오나, 고운 님 퉁소 소리.

이로운 비취(翡翠)는 제 홀로 날아가고

짝 잃은 원앙새 맑은 물에 노니는데,

시름없이 깊은 생각 바둑이나 두거나,

등불은 가물가물 이 내 신세 점치는 듯.

저포(樗蒲) :[민속] 백제 때에 있었다는 놀이의 하나. 주사위 같은 것을 나무로 만들어 던져서 승부를 겨루는 것으로, 윷놀이와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南原 萬福寺址 五層石塔.보물 제30호)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만복사의 옛터에 서 있는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땅에 파묻혀 있는데, 이는 훗날 이 지역의 땅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줄어 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문화재청 자료)

 

 

               

만복사지 폐탑

 

만복사지석좌 (萬福寺址石座.보물 제31호)  

만복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 석좌는 절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는 낮으며,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넓어지고,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이며,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자료)

 

 

 

동쪽에 5층전이 있고 서쪽에는 2층전이 있으며 그 안에 35척이나 되는 동불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목탑지의 정면에 있는 석등의 하대석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南原 萬福寺址 幢竿支柱.보물 제32호)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만복사터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지주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래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생략화·단순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문화재청 자료)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보물 제43호)

전라북도 남원시 만복사 절터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불상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창건된 사찰이고, 이 석조여래입상도 창건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이 있고 그 안에 35척(尺)의 금동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기록으로 보아 만복사가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 등도 아주 원만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둥근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깃의 접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둥근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굵은 선으로 구분되고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부처가 들어 있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얼굴이나 몸 등에서 매우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드러나 있지만 옷주름이나 몸의 자세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해가는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문화재청 자료) 

위의 설명문 마지막 부분에 "뒷면에는 부처의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고 하였지만,  광배 뒷면에는 정병(淨甁)을 든 여래입상이 선각되어 있다.

 

 

 

 

 

 

 

광배 뒷면에는 정병(淨甁)을 든 여래입상이 선각되어 있다. 왼쪽 어깨에서 매듭져 드리워진 착의법 등은 마치 고려불화를 보는 듯 섬세하며, 특히 석재 표면을 그대로 둔 채 주위만을 다듬은 것은 회화적 표현법을 느끼게 한다.

 

 

 

 

 

석인상의 동남쪽에 다른 석인상이 더 있는것으로 밝혀졌다. 이 석인상은 두 개로 파손된 상태로 머리부분이 현재 남원향토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머리부분은 후대에 파손된 것이 아니고, 본래 석재가 짧았던지 목 부분에 촉을 만들어 동체부 상단부 중앙에 뚫린 촉구멍에 끼워 맞추도록 되어 있다. 이 석인상들의 용도와 관련해서는 당간지주, 신장상, 석인상, 장승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런데 좌우대칭인 두 개의 석인상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바닥부분에서 45c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면서 서로 마주보는 내측의 평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동일하게 맞뚫려 있는 점에서 일단 당간지주로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만복사지 앞 도로변에 석인상이 묻혀 있을 때의 상태  

국보도록(1957)의 만복사지 석인상과 당간지주 

조선고적도보의 만복사지 석인상

 

 

 

목탑지

동금당지

동금당지

북금당지와 목탑지(사진;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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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금당지  

북금당지 연화대좌 하대좌. 불상을 안치했던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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