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상북도/봉화

내성 유곡 권충재 관계유적(乃城 酉谷 權沖齋 關係遺蹟)

노촌魯村 2013. 4. 8. 14:27

 

권벌(權橃) :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沖齋), 시호는 충정공(忠定公), 본관은 안동으로 성균생원 사빈(士彬)의 둘째 아들이다.
연산 2년(148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종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예조참판겸동중추부사가 되었다. 당시 사람파와 훈구파의 반목이 심하자 양자간을 조정하려다가 잘 안되어 삼척부사로 나왔다가 42세 되던해에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닭실에 터를 잡아 15년간 은거했다. 다시 부름을 받아 밀양부사, 한성좌윤을 거쳐 1538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형조와 병조의 참판, 한성판윤을 지냈다.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오위도충부의 도총관,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여 원상(院相)이 되었다.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억울한 선비들을 구하려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평안도 삭주(朔州)에 유배되어 71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간신 정막개, 이극돈, 유자광을 논죄하였으며, 소릉(단종모후)의 복위와 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울 것을 여러 차례 주청하였다. 선조 1년에는 좌의정, 24(1591)에는 영의정에 증직되고 종계변무의 공로로 광국공신에 추서되었다. 삼계서원에 배향되고 충재집을 남겼다.
유물로는 충재일기 6책(보물 제262호), 근사록 4권, 그밖에 전직류, 고문서, 유묵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충재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봉화군청 자료)

청암정

 

 

 

 

미수 허목이 별세 3일 전에 쓴 절필 ‘청암수석(靑巖水石)’

이 글씨는 미수가 청암정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여러 번 듣고는 한 번 찾아가보려고 했으나 결국 가보지 못하고, 별세하기 사흘 전에 그 마음을 담아 써 준 작품이다.

‘청암수석(靑巖水石)’  옆의 작은 해서 글씨 내용

청암정은 춘양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 쓰다.(靑岩亭者 春陽權忠定公山水舊墻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충재선생이 공부하던 별채

 

 

 

 

 

 

충재박물관

 

 

 

 

 

 

 

 

 

 

 

 

 

 

 

 

 

 

 

 

 

 

 

 

 

 

 

 

 

 

 

 

 

 

 

 

 

 

 

 

 

 

 

 

 

 

 

 

 

 

 

 

 

 

주자대전  

 

 

 

 

 

 

 

 

 

봉화 닭실마을 바로가기 : http://www.darsi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