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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칠장사(七長寺)

노촌魯村 2013. 6. 15. 15:21

칠장사당간(七長寺幢竿.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801-1)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은 ‘칠장사’에서 약 700m 앞 길가에 서 있는데, 남아있는 당간 가운데 드물게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총 높이 11.5m로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연결되어 있으며, 아래부분은 화강암으로 된 좌 ·우 기둥이 버티고 있다. 흙으로 덮여 잘 드러나지 않는 바닥은 네모난 구멍을 마련하여 당간을 꽂았다. 양쪽 기둥은 조각이 없는 소박한 형태로 끝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철당간은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각 이음새부분은 마치 대나무마디처럼 형성되어 있다.
원래는 원통모양의 철통이 30마디를 이루었다고 하며, 칠장사의 지형이 배(舟)모양과 같아 돛대의 역할을 하도록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칠장사 외에는 청주용두사지와 공주갑사에서만 당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매우 희귀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출처:문화재청)

당간이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장엄용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위한 깃대를 말한다.
칠장사에서 약 200m앞쪽 길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주는 동서방향의 장축을 지닌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은 모두 3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지주는 상면 바깥의 모를 죽여 둥글게 처리하고 그 위로 1조의 종선(縱線)을 표현한 것외에는 장식을 하지 않았다.
당간과의 연결홈은 상하로 두개를 마련하였는데, 위쪽의 간구(竿溝)는 지주의 상면에 장방형의 홈을 파서 당간의 넷째마디 바로 밑에서 지주와 연결되도록 시설하였고 아래쪽의 간공(竿孔)은 지주의 안쪽면에 방형 구멍을 뚫어 지주와 연결하도록 하였다.
당간은 원래 30개의 원통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14개의 원통이 남아있으며, 제일 아래칸은 길이 68cm, 지름 45cm의 원통으로 하단에 각 칸간 연결을 위한 폭 6cm의 반구형 마디를 마련하였다. 4번째 칸의 경우는 지주와의 연결을 위해 상하로 마디를 두어 마디 두개가 서로 연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각 마디위로는 1조의 양각선을 횡으로 둘렀다. 9번째 칸과 12번째칸에는 각각 「十正」, 「十一」의 명문이 세로로 양각되어 있다. (출처: 안성시청)

칠장사 사적비

칠장사 일주문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는 칠현산 산기슭에 바짝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철따라 바뀌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울창한 숲에 고풍스러운 칠장사가 안겨 한적한 풍광을 연출한다. 칠장사는 손때가 묻지 않아 찬찬히 살펴봐야 할 보물들이 많다. 칠장사 일주문 전방 700m 지점에 전국에 몇 개 없는 철당간이 서있고, 진흙소조로 만든 사천왕상이 찾는 이들을 압도한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수도하고 입적한 고려 때 고승 혜소국사가 현재 비각이 있는 자리에 홍제관이라는 수행처를 세웠고, 현종 5년(1014)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칠장사는 예로부터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잦을 때 사서를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칠장사의 묘미는 빛 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한 대웅전을 찬찬히 굽어보는 것이다. 새것을 덧씌우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칠장사 대웅전이 말해준다. 오랜 풍상을 겪은 대웅전은 단청 문양을 세월에 날려보냈지만 힘있게 뻗은 추녀에서 힘찬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대웅전의 기풍을 눈여겨 보고 있으면 칠장사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자연스레 칠장사에 얽힌 이야기에 귀를 열게 된다. 대웅전 오른쪽 옆에 조각솜씨가 빼어난 석불입상 한 기가 모셔져 있다. 본래 죽산리 봉업사터에 있었던 이 불상은, 절이 폐사되자 죽산중고등학교 교정에까지 흘러갔다. 자연 방치되다가 이곳 칠장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불상은 두광 아래로 발께까지 신광이 표현되어 있고,큼직한 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에 비해 대좌는 풍상의 흔적이 적은 깨끗한 화강암이다. 불상은 특히 얼굴의 눈ㆍ코 부분이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오른손을 들어 살포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차분히 내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자태가 일품이다. 어깨에 걸쳐 가슴을 타고 내린 얇은 법의의 선, 3기의 화볼을 인 두광, 그 뒤로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대의 조각 솜씨가 그 시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화려한 조각솜씨를 미루어 보면 8세기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우수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출처:안성시청)

칠장사소조사천왕상 (七長寺塑造四天王像.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칠장사(七長寺) 사천왕문의 좌우에 2구씩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불가의 신으로 본래는 인도의 민간신이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도량과 불법을 수호하는 일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사천왕상은 진흙으로 만든 뒤 채색한 것으로, 악귀 위에 걸터 앉아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고 얼굴에는 짙은 눈썹, 부릅뜬 눈, 오똑한 코, 수염이 있는 입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사천왕상이 그러하듯 험상굿거나 무섭기보다는 해학적이고 친근함을 준다.
각기 창·칼·비파 등을 들고 있는데,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 다리를 벌리고 앉은 모습 등은 당당하고 위엄에 찬 자세이다. 치밀한 무늬의 갑옷과 옷자락의 표현은 정교하며 원래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천왕문이 세워진 영조 2년(1726)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각 부분의 조각수법에서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출처:문화재청)

삼존불상은 조선후기 불교조각의 첫 장을 여는 17세기 초의 소조삼존불상으로 조성원문이 전하여 제작연대와 조각가를 알 수 있다. 

안성 청룡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임란(壬亂) 이후 대형 소조불상의 제작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기의 불상이다. 삼존불상은 갸름한 난형(卵形)의 얼굴에, 가늘고 긴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고, 이마에서 콧등까지가 편평하게 연결되며, 인중이 돌출하였으며, 미소띤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두부에 비해 어깨는 좁은 편이며 신체는 평판적이다.
본존상은 나발이 크고 투박한데 발제선(髮際線)을 따라서 작은 크기의 나발이 붙어있고 그 위쪽으로는 큰 나발이 붙어있다. 양손은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나타내었다. 내의 윗주름이나 대의 옷주름은 유연하고 복잡하게 표현되었는데, 흙의 가소성(可塑性)이 잘 활용된 듯하다. 좌우협시 보살상의 보관은 후보(後補)된 것이며, 목걸이나 수인에 있어서는 서로 닮은꼴에 가깝지만, 착의형식에는 변화를 나타내어 향(向) 좌측 보현보살상은 어깨 뒤로 쇼올 형태의 천의를 두르고 손목 위에 천의자락을 걸친 천의형(天衣形)이고, 향(向) 우측 문수보살상은 여래의 대의(大衣)형태의 옷을 입은 가사형(袈娑形)이다.
삼존불상은 본존불의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원문을 통해서 만력 31년(1603)화원 광원(廣圓)이 수화승을 맡아 조성한 것이 밝혀졌다. 푸른색 비단에 붉은 경명주사로 쓰여진 발원문에 커다란 글씨로 화원(畵員, 조각승)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데 6명의 화원 가운데 승려가 아닌 화원(李今貞)도 참여한 것으로 보여 흥미롭다.(안성시청 자료)

칠장사대웅전(七長寺大雄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조선 숙종 20년(1694)에 절이 불에 타 숙종 30년에 석규대사가 대웅전을 옮겼다. 영조 12년(1736)에 설영대사가 고쳤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으로 각 칸마다 2개의 공포를 설치했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고, 중앙에는 불단이 있어 그 위에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후기 소규모 절의 대웅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출처:문화재청)

칠장사의 주불전으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전각이다.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매우 오래된 양식이며 그 위에 세운 목조건물은 조선말기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4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제일 윗부분과 그 아래 장대석의 사이는 깊은 홈을 파서 단을 구획하였다. 이 부분은 궁궐건축의 기단에서는 약간 턱을 두는 정도로 처리하는데 이 건물의 경우는 그 수법이 독특하다. 기단 중앙에 있는 계단의 좌우 우석은 위를 약간 둥글게 돌렸으며 우석 측면에는 구름모양의 양각을 하였다.
주초석은 전면의 4기와 제2열의 양측면의 2기는 잘 다듬은 것이고 나머지 것은 자연석이다. 전면의 다듬은 초석들은 전체를 네모지게 가공하고 그 위에 원형의 주조를 두었으며 주좌에는 둥글게 홈을 넣었고, 고맥이까지 뚜렷이 만들었다.이러한 형태의 주춧돌은 대개 통일신라에서 고려중기까지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주춧돌의 형상으로 보아서는 이 주춧돌들이 칠장사의 창건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건물은 약간의 흘림을 둔 둥근 기둥을 세우고 창방·평방을 걸은 위에 다포식의 공포를 짰는데 공포의 형상은 조선말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즉, 살미첨자가 수평으로 뻗으면서 그 끝에 연꽃을 조각한 장식이 가미되고 내부의 끝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지붕은 간단한 맞배지붕인데 지붕 용마루 양끝에 취두를 두었다. 이처럼 사찰의 법당건물에 취두를 올려놓은 것도 대개 조선말기 고종년간의 사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출처:안성시청)

칠장사 대웅전 소맷돌

안성칠장사대웅전목조석가삼존불좌상(安城七長寺大雄殿木造釋迦三尊佛坐像.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

칠장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상은 발원문을 통해 제작연대와 제작자 등을 알 수 있으며, 보존상태가 좋아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 작이다.

안성 칠장사 범종(安城七長寺梵鐘.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안성 칠장사 범종 (安城七長寺梵鐘))  

칠장사 범종은 명문상 1782년에 신안태, 이년성,이영선,이영준,청봉이 제작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음. 범종의 형태와 문양배치에서 조선후기 전형적인 범종형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불교공예사 연구에 차지하는 비중이 큼.(문화재청 자료) 

칠장사 대웅전 내에 있는 이 범종은 종신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범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범종의 상단 용 모양은 쌍용으로 옆에 지름 2cm의 원공(圓孔)이 있으며,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상대(上帶) 대신 원좌(圓座)내에 범자(梵字)를 8군데 조각하고 범자 밑에는 4유곽(乳廓)과 원형두광(圓形頭光)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을 서로 바꾸어 조각했다.
중앙에는 일조의 원대(圓帶)가 있고 그밑에 명문이 있으며, 하대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다.
유곽은 주연에 사선문양이 있으며 단엽의 9연좌 중심에 9유두가 있다.
명문은 「건륭사십칠년임인십일월일시(乾隆四十七年壬寅十一月日時) 죽산도호부사이언충(竹山都護府李彦忠)」이라 했는데, 건륭47년은 조선조 제22대 정조6년(1782)이다.(출처:안성시청)

  

  

안성죽림리삼층석탑(安城竹林里三層石塔.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 

이 탑은 전체 높이가 363cm이고, 지대석은 가로 171cm, 세로 140cm이다.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석탑으로, 중대석은 각 면을 1식으로 마감하고, 갑석은 1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면에 둥근 고리(문비)를 탑몸돌[옥신 : 屋身]에는 양쪽에 모서리기둥 [우주 : 隅柱]을 조각하였다.
2층 이상의 탑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2층과 3층 탑신석은 1층과 같이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옥개석 받침은 각 층 4단을 이룬다. 상륜부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원래 죽산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몇 개의 부재를 모아서 일죽면 죽림리 460번지 성원목장에 복원한 것을 2005.11.28. 칠장사로 이전 설치한 것이다. (충처:안성시청)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安城 奉業寺址 石造如來立像.보물  제983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원래 봉업사지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
불상과 광배(光背)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눈·코·입은 심하게 닳았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칠장사 거북바위

칠장사 원통전 

칠장사 원통전  관세음보살 

 칠장사 원통전의 소맷돌

 칠장사 원통전 앞의 폐탑

 칠장사 명부전

안성 칠장사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7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

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등은 제작연대와 제작자 등을 추정할 수 있고, 보존상태가 우수하여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작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전설 따라 삼천리... 아니 칠장사 ...)

 

궁예의 전설 : 궁예는 신라 말기 헌안왕의 庶子로 태어나, 권력싸움으로 이 곳으로 피신하여 13살까지 살았던 궁지(宮趾)이기도 하다. 

혼란의 시대를 아프게 살아가며 이 곳에서 궁예는 미륵의 꿈을 키운다.  활을 잘 쏘아 이름도 궁예(弓裔)... 이 곳 주위에 궁예가 활 쏘던 활터도 남아 있다고 한다

 

칠현산. 칠장사 전설 : 칠장사는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돌아와 가르침을 펼칠 때 일곱명의 악인이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니 국사가 이들을 거두어 모두 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후로 사람들이 칠장사가 속해있는 산을 아미산(蛾眉山)에서 일곱명의 현인을 뜻하는 칠현산으로 고쳐부르고, 칠장사(漆長寺)도 칠장사(七長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

어사 박문수의 전설 : 과거를 보기위해 상경하던 암행어사 박문수는 이곳에 하루를 머문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조청유과를 올리며 정성껏 기도를 드리고 잠을 잔다. 꿈에 문제가 나오고, 그는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이 곳에 들러 조청유과를 올린다. 몽중등과시(夢中登科時). 지금도 입시기도를 많이한다.

임꺽정의 전설 : 칠장사에 기거하던 갓바치를 찾아온 임꺽정에게 절의 승려(병해대사)가 말타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의 말을 주었고. 임꺽정은 이 말의 이름을 칠장마(七長馬)라고 불렀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드라마 임꺽정 촬영도 여기에서 ...

어사 박문수의 전설이 어린 나한전 

전각 뒷편에 보이는 소나무는 고려말 왕사인 나옹스님이 심은 나옹송으로, 높이가 약 8m인 나옹송은 수령이 600여년이 된다고 하며,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혜소국사비 앞 1칸짜리 나한전에는 칠현인의 현신이라는 일곱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나한상들은 본래 경내 노천에 있었는데, 1703년 전각을 마룐하고 이곳에 모신다는 내용의 현판이 있다.(경기남부와 남한강에서 발췌.돌베게)

 

나한전 앞 예배 공간이 없을 때의 모습(출처: 불교TV에서 캡쳐)

나한전 앞 예배 공간이 없을 때의 모습(출처: 불교TV에서 캡쳐)

    

어사박문수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어사 박문수(1691년-1756년)는 호가 기은이고 본은 고령이다. 1723년 증광시 병과 진사과에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간 후 병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및 경상관찰사 함경관찰사를 역임하였고 특히 경상도, 충청도 암행어사를 제수 받아 맹활약을 하여 오늘날 어사 박문수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칠장사와는 박문수가 과거에 급제할 때 맺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박문수가 32세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를 못하고 있었는데, 1723년에 실시하는 증광시에 응시하러 갈 때 이야기다. 박문수는 어머니의 청을 따라 한양 과거길에 칠장사에 들러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지내게 되는데, 그날 꿈에 나한전 부처님이 나와 과거에 나올 시제의 총 여덟 줄 중 첫째 줄부터 일곱째 줄까지를 알려주고, 나머지 한 줄은 스스로 생각하여 쓰도록 하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박문수가 한양에 올라가 과것날 성균관 과장에서 시제를 접하고 보니 칠장사 나한전에 빌고 꿈속에서 얻은 시험 문제가 고스란히 나와 장원급제를 하여, 이를 두고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 일컬어진다.

아래는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의 전문이다.

落照吐紅掛碧山 (낙조토홍괘벽산)

토하는듯 넘어가는 붉은빛은 푸른산에 걸려있고
寒鴉尺盡白雲間 (한아척진백운간)

기러기는 자로잰듯 힌구름 사이로 사라지며
問津行客鞭應急 (문진행객편응급)

나루를 찾는 나그네의 독촉은 응당 급해지고
尋寺歸僧杖不閒 (심사귀승장불한)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는 한가롭지 않으며
放牧園中牛帶影 (방목원중우대영)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의 그림자는 허리가운데로 들어가고
望夫臺 上妾低鬟 (망부대상첩저환)

댓돌위에서 서방을 기다리는 아낙의 쪽이 뒤로 젖혀지며
蒼煙古木溪南里 (창연고목계남리)

고목으로 저녁 짓는 푸른 연기가 남쪽마을 계곡으로 올라가고 
短髮樵童弄苖還 (단발초동농적환)

나무를 하는 떡거머리 총각이 즐거운 듯이 풀피리를 불며 돌아간다

이상이 박문수가 과거 볼 때 제출하여 장원 급제를 한 글로서 칠장사 나한전에 빌고 그 날 밤을 칠장사에서 자면서 꿈속에 부처님의 계시를 받은 글이다. 일곱째 줄까지는  부처님이 꿈속에서 가르쳐 준 것이고, 마지막 여덟째 줄은 박문수가 지은 것이다. 이글이 오늘날 까지 전하여 오는 유명한 박문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다.(출처:불교포커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보물  제488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경내 (칠장리))

승려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비문(碑文)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김현 선생이 짓고, 글씨는 전중승, 민상제 선생이 구양순체(歐陽洵體)로 썼다.
이 비신의 높이는 3.4m, 폭은 1.28m이고, 귀부(龜趺)의 귀갑(龜甲)은 방원형, 비몸돌(碑身)의 양면에는 여의주(如意珠)를 가지고 노는 범 비슷한데 비늘이 있다는 짐승인 이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비몸돌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비몸 위에 올려지는 부분인 이수에는 거북과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물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이것은 비의 주인공인 혜소 국사의 영혼을 천상세계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며,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 

혜소 국사는 972년 (고려광종3)안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이 이씨요 이름은 정현(鼎賢)으로 10세에 삭발 입산하여 광교사 충회에게 구법하고, 17세에 영통사에서 융철(融哲)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28세에 왕명에 의하여 고승으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대사는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면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1054년(문종8)에 이 절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출처:안성시청)

나한전 옆에 있는 혜소국사비(碑)는 지금은 비와 받침돌, 몸돌, 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다. 특히 몸돌은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양 측면에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주차장쪽으로 위치한 누각  

주차장쪽으로 위치한 누각 기둥이 이채롭다

범종루 

사진출처:문화재청

칠장사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국보  제296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괘불탱화란 야외에서 불교의식을 행할 때 높이 걸어 놓아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만든 커다란 의식용 불화를 일컫는 말이다.
칠장사에 있는 오불회괘불탱화는 국내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것으로써 조선 인조 6년(1628. 승정원년) 범형비구니에 의해 그려진 군집도 형식의 불화이다. 구름을 이용하여 화면을 상, 중, 하 3단으로 구분지은 다음 오불회와 도솔천궁을 적절하게 배치한 이 괘불도는 길이 6.56m, 폭 4.04m로 비록 중간 크기이긴 하지만,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유려한 필선, 화사하면서도 은은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서 예배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불교 그림은 단일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반하여 이 괘불도에서는 삼신불을 묘사한 상단과 삼세불의 세계인 중단, 수미산 정상의 도솔 천궁을 표현한 하단 등 3단구성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화폭 전면에 펼쳐져 있는 밝은 색조의 구름과 불옷의 선명한 홍색으로 경쾌함을 보여주며,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하고 치밀한 필치 등에 있어서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7세기전반의 불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안성시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칠장사삼불회괘불탱(七長寺三佛會掛佛幀.보물  제1256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1710년 (숙종36)에 조성된 마본채색(麻本彩色)의 대영산회도(大靈山會圖)는 가로 4.54m, 세로 6.28m의 화폭에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의 모임인 영산회(靈山圖)를 그린것으로, 거신형 광배에 결가부좌한 석가불은 팔대보살, 십대제사, 사리불,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금강역사등의 협시들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다. 신체에 비해 다소 크게 묘사된 방형의 얼굴은 표정이 경직되고 엄숙하며, 신광안에는 변형된 화문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수미단 아래에는 사리불이법문을 청하고 있다. 문수, 보현보살과 나머지 보살들도 보존과 같은 얼굴표정을 짓고 각기 합장을 한 모습이며, 제석, 범천은 약간 작은 크기와 채색을 달리한 얼굴을 하여 다른 보살들과 구별되고 있다.
상단에는 이중륜광의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이 각기 협시를 거느리고 배치되어 있는데 노사나불은 보살형으로 영락장식이 화려한 보관에 설법인을 짓고 있으며, 아미타불은 지장보살과 대세지보살등 사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이들 사이의 보탑은 화면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상단에는 용왕, 용녀,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반원형의 광배 안에 9구의 보살과 좌우 5구씩의 십방제불(十方諸佛)이 천상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괘불도는 하단은 영산회상도, 상단은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을 묘사하고 있어 상단을 떼어내어도 단독의 영산회상도를 보여주는 독특한 도상인데 삼신불과 삼불화를 가장 간략하게 묘사한것으로, 이러한 간략화시키는 구성은 조선후기에 유행하고 있다(출처:안성시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보물  제1627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인목왕후가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당으로 삼아 사찰을 중건하여 친히 김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0권과 친필족자 1령을 하사한 것인데, 현재는 친필 족자 1령만 보존되고 있다. 

<인목왕후 (1584 ∼ 1632)>
인목왕후는 1584(선조 17)년에 태어나 1602(선조 35)년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의 모후이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유영경(柳永慶)일파가 몰락하고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등이 득세하여 1613(광해군5)년 대북파의 흉계로 영창대군이 강화로 쫓겨난 후에 피살되고 김제남 등이 사사(賜死)된 뒤를 이어 인목왕후도 폐모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1623(광해군 15)년에 인조반정으로 복호되고 대왕대비가 되어 인경궁 흠명전에 기거하다가 1632(인조 10)년 세상을 떠났다.
칠장사에 소장중인 인목왕후 친필족자는 대비가 부친인 김제남 선생과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七長寺)를 원당(願堂)으로 삼고자 중건하면서 친히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0권과 친필족자 1령(一領)을 하사한 것인데, 현재는 인목왕후 친필족자 1령만 홍제관에 보존되어 있고, 금광명최승왕경은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인목왕후 친필족자는 인조(1623~ 1649)연간에 만든것으로 세로 110cm, 가로 50cm의 직사각형으로 28자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노우용력기다년(老牛用力己多年)하니, 영파피천지애면(領破皮穿只愛眠)하고, 취파기휴춘우족(聚耙己休春雨足)한데, 주인하고우가편(主人何苦又加鞭)인가?" 이를 번역하면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목덜미 쭈그러들고 가죽은 헤져서 졸립기만 하고, 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 또한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 이런 글이 쓰여 있는데, 이 한시(漢時)는 늙은 소의 고달품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고 있다.(출처:안성시청)

영각

영각에는 칠장사에 전답을 시주한 부부의 영정이 있으며, 그 왼쪽에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불교TV 칠현산 칠장사 바로가기 :  

 

 

http://www.btn.co.kr/vod/vod_player.asp?PID=P381&DPID=37664&FSIZE=DBL#

 

칠현산 칠장사 일주문까지 마중나온  달맞이꽃. 해가 아직 하늘 중천에 있는데 ...반가운 마음에 한장 촬영 !!!(전생의 어떤의 분의 모습일까 ... ... ???)

늦도록 밭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의 지게 위에서

하늘거리던 달맞이꽃 모습이 떠오릅니다.

달맞이꽃(Oenothera odorata) :

식물꽃이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오므라들었다가 밤이 되면 활짝 벌어지기 때문에

밤에 달을 맞이하는 꽃이라고 해서 '달맞이꽃'이란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