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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칠장사오불회괘불탱. 칠장사삼불회괘불탱.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노촌魯村 2013. 6. 15. 14:51

 

사진출처:문화재청

칠장사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국보  제296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괘불탱화란 야외에서 불교의식을 행할 때 높이 걸어 놓아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만든 커다란 의식용 불화를 일컫는 말이다.
칠장사에 있는 오불회괘불탱화는 국내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것으로써 조선 인조 6년(1628. 승정원년) 범형비구니에 의해 그려진 군집도 형식의 불화이다. 구름을 이용하여 화면을 상, 중, 하 3단으로 구분지은 다음 오불회와 도솔천궁을 적절하게 배치한 이 괘불도는 길이 6.56m, 폭 4.04m로 비록 중간 크기이긴 하지만,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유려한 필선, 화사하면서도 은은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서 예배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불교 그림은 단일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반하여 이 괘불도에서는 삼신불을 묘사한 상단과 삼세불의 세계인 중단, 수미산 정상의 도솔 천궁을 표현한 하단 등 3단구성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화폭 전면에 펼쳐져 있는 밝은 색조의 구름과 불옷의 선명한 홍색으로 경쾌함을 보여주며,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하고 치밀한 필치 등에 있어서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7세기전반의 불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안성시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칠장사삼불회괘불탱(七長寺三佛會掛佛幀.보물  제1256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1710년 (숙종36)에 조성된 마본채색(麻本彩色)의 대영산회도(大靈山會圖)는 가로 4.54m, 세로 6.28m의 화폭에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의 모임인 영산회(靈山圖)를 그린것으로, 거신형 광배에 결가부좌한 석가불은 팔대보살, 십대제사, 사리불,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금강역사등의 협시들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다. 신체에 비해 다소 크게 묘사된 방형의 얼굴은 표정이 경직되고 엄숙하며, 신광안에는 변형된 화문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수미단 아래에는 사리불이법문을 청하고 있다. 문수, 보현보살과 나머지 보살들도 보존과 같은 얼굴표정을 짓고 각기 합장을 한 모습이며, 제석, 범천은 약간 작은 크기와 채색을 달리한 얼굴을 하여 다른 보살들과 구별되고 있다.
상단에는 이중륜광의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이 각기 협시를 거느리고 배치되어 있는데 노사나불은 보살형으로 영락장식이 화려한 보관에 설법인을 짓고 있으며, 아미타불은 지장보살과 대세지보살등 사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이들 사이의 보탑은 화면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상단에는 용왕, 용녀,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반원형의 광배 안에 9구의 보살과 좌우 5구씩의 십방제불(十方諸佛)이 천상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괘불도는 하단은 영산회상도, 상단은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을 묘사하고 있어 상단을 떼어내어도 단독의 영산회상도를 보여주는 독특한 도상인데 삼신불과 삼불화를 가장 간략하게 묘사한것으로, 이러한 간략화시키는 구성은 조선후기에 유행하고 있다(출처:안성시청)

사진출처:문화재청

대웅전 앞의 괘불대

괘불석주(掛佛石柱) :  경기도 안성 칠장사 괘불석주(掛佛石柱)‘괘불탱기석 급탱죽조성기(掛佛基石 及撑竹造成記)’라는 글씨가 조각되어 있어서, 괘불석주의 옛 이름이 ‘탱기석’ 또는 ‘탱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 사찰의 대웅전이나 중심 법당 기단의 돌계단 입구 좌우에 두 쌍의 돌기둥이 서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야단법석을 할 때 괘불을 높이 걸 수 있도록 괘불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기둥으로 큰 것은 2m가 넘고 작은 것은 60cm 정도이다.

사진출처:불교TV 칠현산 칠장사에서 캡쳐

사진출처:문화재청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보물  제1627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인목왕후가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당으로 삼아 사찰을 중건하여 친히 김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0권과 친필족자 1령을 하사한 것인데, 현재는 친필 족자 1령만 보존되고 있다. 

<인목왕후 (1584 ∼ 1632)>
인목왕후는 1584(선조 17)년에 태어나 1602(선조 35)년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의 모후이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유영경(柳永慶)일파가 몰락하고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등이 득세하여 1613(광해군5)년 대북파의 흉계로 영창대군이 강화로 쫓겨난 후에 피살되고 김제남 등이 사사(賜死)된 뒤를 이어 인목왕후도 폐모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1623(광해군 15)년에 인조반정으로 복호되고 대왕대비가 되어 인경궁 흠명전에 기거하다가 1632(인조 10)년 세상을 떠났다.
칠장사에 소장중인 인목왕후 친필족자는 대비가 부친인 김제남 선생과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七長寺)를 원당(願堂)으로 삼고자 중건하면서 친히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0권과 친필족자 1령(一領)을 하사한 것인데, 현재는 인목왕후 친필족자 1령만 홍제관에 보존되어 있고, 금광명최승왕경은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인목왕후 친필족자는 인조(1623~ 1649)연간에 만든것으로 세로 110cm, 가로 50cm의 직사각형으로 28자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노우용력기다년(老牛用力己多年)하니, 영파피천지애면(領破皮穿只愛眠)하고, 취파기휴춘우족(聚耙己休春雨足)한데, 주인하고우가편(主人何苦又加鞭)인가?" 이를 번역하면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목덜미 쭈그러들고 가죽은 헤져서 졸립기만 하고, 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 또한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 이런 글이 쓰여 있는데, 이 한시(漢時)는 늙은 소의 고달품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고 있다.(출처:안성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