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강원도

삼척 천은사(天恩寺)

노촌魯村 2013. 9. 1. 15:16

삼척 천은사(天恩寺)는 신라 경덕왕 17년(758년)에 두타삼선(頭陀三仙 : 인도에서 온 3명의 승려.(두타 : 頭陀.  범어 dhuta의 음역이다. 두다(杜茶). 두다(杜多). 투다(投多)라고도 쓰며 두수(枓수). 두수(斗藪). 수치(修治). 기제(棄除)라 번역한다. 의직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두수(枓수) 두수(斗藪)란 번뇌의 때를 떨어버린다는 의미다.) 이 창건하였다. 흥덕왕 4년(829년)에 범일국사가 극락보전을 건립하여 절의 면모를 갖추었고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별장을 시주하여 간장암(대장을 다 읽었다는 뜻)을 지었다.

이후 청허 서산대사가 중건하여 흑악사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1899년에 이성계의 4대조 목조릉을 만들면서 이 절을 원찰로 삼고 임금(하늘)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천은사라 하였다.

이것이 천은사의 약사(略史)다. 그 간략한 역사 속에서 반짝 빛나는 것이 있다. 역사는 순간순간마다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그 중에서도 진주처럼 빛나는 한 부분이 있다. 삼척에서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역사의 한 줄기, 그것은 바로 이승휴다. 이승휴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기 때문이다.

29세(1252년. 고종3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몽고족의 침략을 당해 이승휴는 강도(강화도)에 합류하지 못하고 이곳 삼척의 요전산성에서 몽고족에 항쟁하였다. 그 후 두타산의 구동(龜洞)에 집을 짓고 어머니를 봉양하며 10여년을 보내다가 안집사(安集使) 李深의 주선으로 강화의 이장용 이경 등에게 求官詩를 보냈다. 그 결과 이들로부터 추천받아 경흥(강릉)의 서기로 벼슬길에 올랐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10여년이 지나 41세의 늦은 출사지만 또 다시 10여년이 지난 1273년에는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쳤고 이듬해에는 원종이 서거하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태자(충렬왕)가 고려의 상복으로 예를 갖출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인식시킬 만큼 국가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역사를 보면 강직한 인물이 국가 발전을 위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 성격 때문에 부러지고 마는 예를 볼 수 있다. 조광조가 그랬고 사육신이 그랬고 이승휴도 그랬다.

충렬왕 때 양광충청도안렴사가 되어 7명의 장리(贓吏)를 탄핵했다가 그들의 원한으로 좌천을 당한 일도 있고, 1280년에는 국왕의 실정과 측근들의 폐단을 10개항으로 간언(諫言)하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간언으로 인한 파직이 이승휴에게는 불행한 일이었겠지만 이 민족을 위해서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바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찾아주는 제왕운기를 탄생케 하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다산 정약용의 18년 귀양살이가 없었으면 어떻게 그 많은 저술이 나타날 수 있고 심오한 철학의 세계가 열릴 수 있었을 것인가.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가 순탄하게 벼슬살이만 하고 귀양길에 오르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 아름다운 가사와 시조가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인가. 정치나 학문적으로 큰 인물들은 나라에서 강제로 몇 년씩 유배시키는 것도 국가 발전을 위한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의 정치인들도 몇 년씩 감옥살이를 한 뒤에는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을 골라 느슨한 유급 휴가의 성격을 띤 안식년제보다는 오지마을이나 외딴 섬에 가두어 놓고 그들의 성숙한 결과물을 기대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역사 발전의 한 모델이 될 수 있겠다.(출처 : 삼척시청) 

삼척 천은사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三陟 天恩寺 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7호)
약사전
삼척 천은사약사여래입상 (三陟 天恩寺 藥師如來立像)
천은사 삼성각
천은사 맷돌
천은사 모과(약사전과 극락보전 사이)
동안사
동안사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三陟頭陀山李承休遺墟. 사적 제421호. 강원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785번지 외)

이 유적은 태백산맥의 지맥인 두타산의 천은사 일대에 위치하며, 고려 충렬왕 13년(1287)때 문인이며 정치가인 동안거사< 動安居士 > 이승휴< 李承休 > 선생이 우리 민족의 역사서인 동시에 대서사시인 제왕운기< 帝王韻紀 >를 저술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승휴 선생은 당시 이곳에 제왕운기의 산실이 된 용안당< 容安堂 >을 짓고 기거하면서, 용안당 아래쪽에 있던 표음정< 瓢飮渟 >이란 우물 위에 보광정< 보光亭 >을 짓고 그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화초를 심었으며 보광정 아래에 지락당< 知樂塘 >이란 방지< 方池 >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동안거사집》의 '보광정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난 '98년 실시한 관동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도 당시의 절터 건물지, 연못 흔적, 청자요지 등을 확인한 바 있다.(출처 : 삼척시청)   

이승휴(李承休) : 1224(고종 11)-130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이며,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 가리현(京山 加利縣 ; 지금의 경북 성주)출신으로 가리(加利) 이씨(李氏)의 시조이다. 그런데 이승휴는 부친을 일찍 여윈 관계로 외가인 삼척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그의 행적은 가리현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삼척에서만 대부분이 나타나고 있다. 이승휴는 1224년(고종 11)에 태어났다.

9세(1232)에 독서를 시작하여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당시의 명유(名儒) 신서(申?)에게서《左傳》과《周易》등을 익혔다.

14세(1237)에 부친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에게서 양육되었다. 그후 몽고군의 침입이 있자, 고려정부가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 들어가 최충(崔沖)의 사학(私學) 9재(九齋) 가운데 하나인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이규보(李奎報), 김창(金敞) 등에 의해 그동안 유명무실해진 사학(私學) 12도(十二徒)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는데, 이승휴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가 지은 병과시(病課詩)에 의하면, 한번은 낙성재 도회소에서 여러 학도들과 더불어 연회를 갖다가 그만 술에 취해 울고 말았는데, 이것을 기롱한 교도(敎導) 홍열(洪烈)의 시(詩)가 도하(都下)에 전파되어 주광(酒狂)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이승휴는 최자(崔滋)에게 지우(知遇)를 받게 되었다.

최자는 이규보의 대를 이어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친 인물이었다. 이승휴는 1252년(고종 39) 29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최자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주관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이승휴는 홀 어머니가 있는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1254년(고종 41) 몽고의 5차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자, 이승휴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삼척의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고군에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그후 강화도에 돌아가고자 해도 최자와 돌보아주던 종조모가 세상을 떠나 의지할만한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환도(還都)하지 못하고 삼척 두타산의 구동(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는 동안 최씨 무인정권은 무너지고 고려정부는 몽고와 강화하게 되었다.

이승휴는 40세가 되는 1263년(원종 4)에 당시 강원도 안집사(安集使)로 온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심(李深)의 주선으로 강화에 돌아가서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최윤개(崔允愷)·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최수황(崔守璜)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보내는 등 관직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도호부판관겸장서기(慶興都護府判官兼掌書記)에 보임되었다. 이후 1270년(원종 11) 삼별초가 봉기하자, 이승휴는 군의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이 크게 일어나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하였다.

1273년(원종 14)에는 식목녹사(式目錄事)로 있었는데, 당시 정부가 제배하는데 있어 초배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누차 제배받았던 인물들을 제외시키자 불만을 상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이것이 발각되어 문죄를 받게 되었을 때, 이승휴는 상소문의 기초자로 연루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원종(元宗)이 상부의 장의(狀意)와 방문(傍聞)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재조사를 시켜 누명이 벗겨졌는데, 이승휴는 양부(兩府)의 장론(狀論)에 실수의 오점을 남길 수 없다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하였는데, 그가 원나라에 가서 올린 진사선미(陳謝宣美)는 원나라의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으며, 동행하였던 송조국(宋祖國)도 '문장감중화자(文章感中華者)'라고 탄복하였다. 그후 이승휴는 원나라의 사행의 공으로 잡직서령겸도병마록사(雜職署令兼都兵馬錄事)에 보임되었다.

다음해에 이승휴는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는데, 그는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의 득실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그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충청도(忠淸道)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臟吏) 7인을 탄핵하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였다가 원한을 사서 동주(東州;지금의 철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이승휴는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 일컬었다. 그리고 얼마후 전중시사(殿中侍史)로 다시 임명되었다. 충렬왕은 즉위 초기에 문신 재추관료들과 결합하여 원나라 및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태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侍從)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승휴는 1280년(충렬왕 6) 감찰사(監察司)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를 간언했다가 파직되었다.

이승휴는 파면당한 뒤 다시 삼척의 구동(龜洞)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당호(堂號)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심용슬지역안(審容膝之易安)'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국사(國事)와 세론(世論)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자 하였으며, 도연명과 같이 전원의 일민(逸民)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고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이승휴는 <帝王韻紀> 와 <內典錄> 을 저술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선왕은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대다수 관료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기의 지지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 이에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 이전의 충렬왕 측근과 대립하였던 자들을 특별히 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휴도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충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 左諫議大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 試秘書監 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 判秘書寺事 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정치에는 충렬왕대에 국왕의 측근세력과 타협하면서 성장하였던 사람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이승휴는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구실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여 마침내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치사하였다. 그후 1300년(충렬왕 26)에 7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출처:삼척시청)

제왕운기(帝王韻紀) :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사람 이승휴(李承休) 가 저술하였는데 그는 언관으로 있으면서 왕에게 상소하여 시 사(時事)를 극론(極論)하다가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외가(外 家) 곳인 삼척 두타산(頭陀山) 구동(龜洞) 용계(龍溪)변 (현天 恩寺)에 별서(別墅)를 지어놓고 전원생활(田園生活)을 할 때 저술한 것이 제왕운기다.
제왕운기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사 에 운(韻)을 붙여 적은 책 상·하 2권으로, 상권은 중국의 역사 를,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시로 읊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한국사 부문인 하권을 다시 1·2부로 나누어, 제1부에는 먼저 지리기(地理記)를 붙이고, 이어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 開國年代)라 하여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한사군·삼한· 신라·고구려·부여·후고구려·백제·후백제·발해를 1,490귀 의 7언시로 기술, 제 2부는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 代)라 하여 700귀의 5언시로 고려초부터 충렬왕 때까지를 기록 했다. 하권 제1부의 전조선(前朝鮮)은 단군 조선에 관한 기록으로서 삼국유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며 유사(遺 事)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보인다.
고려 충렬왕 때에 경상도 진주(晋州)에서 부사(府使) 이원 등이 왕명으로 개판, 공민왕6년 (1360)에 안극인(安克仁)이 경상도 안렴사(安廉使)로 있을 때 경주에서 중간 태종, 17년(1417)에 경주에서 3판이 나왔다. 1939 년에 조선고전간행회에서 이 책을 대본으로 영인 간행한 바 있다. (출처:삼척시청)

통방아:물이 차면 공이가 치켜졌다가 물이 쏟아지면 앞이 무거워 내려 꽂히면서 공이가 확의 곡식을 찧게 만들었다.

 

'강원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척 죽서루 (三陟 竹西樓)  (0) 2013.09.29
삼척 준경묘·영경묘(三陟 濬慶墓·永慶墓)  (0) 2013.09.04
삼척 교수당(三陟敎授堂)  (0) 2013.09.01
삼척 공양왕릉(三陟恭讓王陵)  (0) 2013.08.31
삼부연폭포  (0) 2013.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