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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 준경묘·영경묘(三陟 濬慶墓·永慶墓)

노촌魯村 2013. 9. 4. 19:11

 삼척 준경묘(三陟 濬慶墓)

삼척 준경묘·영경묘(三陟 濬慶墓·永慶墓.사적 제524호. 강원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149번지 등)

준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부인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이고, 영경묘는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이다. 준경묘는 활기리에 있고, 영경묘는 약 4㎞ 떨어진 하사전리에 있다.

1899년에 왕명으로 묘소를 짓고, 재각(齋閣: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 또는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제실(祭室)·비각(碑閣) 등을 세웠다. 준경묘 앞에는 앞면 3칸·옆면 2칸짜리 제각이 있는데, 지붕선이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이 제각은 왕릉에 세워지는 정(丁)자형이 아니라 단순한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경치가 좋은 곳이며, 이곳의 소나무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이성계의 5대 조부 양무장군의 묘로 1899년에 영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자각, 비각을 건축하고 舊居址에 재실, 비각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여기서만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전주이씨의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의 시조 묘로 매년 4월 20일에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올리고 있다. 1984년 8월에는 삼척군에서 영경묘와 함께 재각, 비각, 재실, 홍살문 등을 일제히 보수하였다.

묘 앞의 제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일자각(一字閣)으로 왕릉의 제각(祭閣)인 정자각(丁字閣)과는 그 규모가 다르다. 그리고 제각 우측에 "어제준경묘비(御製濬慶墓碑)"라 적힌 비가 비각 안에 있는데, 이 비는 광무 3년(1899)에 자헌대부 이근명이 비문을 서했다. 활기리 마을에 있는 재실은 ㅁ자 와가(瓦家)로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제기(祭器)가 보관되어 있다. 재실 바로 앞에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이 비는 광무 3년(1899)에 이중하가 어명으로 세웠고, 재실도 이때 이중하의 감독으로 지어졌다. 영경묘는 태조의 5대 조모 평창 이씨의 묘로, 1899년에 준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자각, 비각을 건축하고 영경묘라고 하였다. 이 묘는 준경묘와 함께 전주 이씨의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 묘이며 매년 4월 20일 전주 이씨 문중에서 제례를 지낸다. 비각 안에 있는 "어제영경묘비(御製永慶墓碑)"는 광무 3년(1899)에 정헌대부 민병석이 서(書)했다.(출처 : 삼척시청)

 

 

 

 

 삼척 영경묘(三陟 永慶墓)

 

 

영경묘는 태조의 5대 조모 평창 이씨의 묘로, 1899년에 준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자각, 비각을 건축하고 영경묘라고 하였다.

 

 

 

 

 

 

 

 



 

영경묘 주변의 금강송

백우금관의 설화

조선왕조 창업의 산실로 불리는 준경묘에는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冠)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목조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게 됩니다. 목조는 아버지의 묘자리를 찾기 위해 산 속을 헤매다가 나무 밑에서 잠시 쉬는데, 한 도승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펴보고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혼잣말로“참 좋구나 . 대지(大地)로다”라고 하였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도승은 계속해 “개토제(開土祭)에 소 일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관을 금으로 만들어 장사지내면 5대 안에 왕이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주가 될 명당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골몰히 생각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와 금으로 만든 관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안사는 궁리 끝에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므로 소 일백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금관을 대신하면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소가 있어 부인에게 내일 밭갈이를 하려고 하니 처가의 흰 소를 잠시 빌려오라고 하였다.

다음날 부인이 몰고 온 흰 소를 잡아 제물로 사용하고 황금색 귀리 짚으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이렇게 장례를 치른 후 이양무의 5대손인 이성계가 마침내 왕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출처:삼척시청)

목 조(穆 祖) : ? - 1274(원종 15),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본명은 이안사(李安社), 본관은 전주(全州), 장군(將軍) 양무(陽茂)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齊)의 딸이다. 목조는 전주의 토호(土豪)였는데,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지주(知州;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를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하여 가솔과 토착인 170여호를 거느리고 삼척(三陟)의 활기동(活耆洞)에 이주하였다. 여기서 1231년(고종 18) 5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노동(蘆洞)에 장사를 지냈고, 또 모친상을 당하여 동산(東山)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삼척에 이주해 온 이안사는 배를 건조하여 왜구를 방어하였으며, 1253년(고종 40) 몽고의 4차 침입에 대항하여 두타산성에서 항전하였다. 그런데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에 이곳에 부임하는 안렴사(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 있을 때 산성별감이었음으로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함길도(咸吉道)의 의주 용주리(宜州 湧州里) 곧 지금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 따라온 170여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는데, 고려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그뒤 원나라가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안사가 머물고 있던 의주도 이에 소속되었다. 따라서 이안사가 와서 그가 거느린 집단은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에 편입되어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남경(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여진족까지 다스리면서 그 세력 기반을 대를 이어 물려 주어 증손 이자춘(李子春 ; 桓祖)까지 몽고의 벼슬을 하였다. 그의 능은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출처: 삼척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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